김해곤 한국섬유패션협동조합 이사장(前 섬유기술사회장) 발간 책자 발췌 특별 기고

다음은 섬유공학계의 권위자이자 면방을 비롯, 섬유산업 실물경영의 대가인 김해곤 전 섬유기술사회장(현 한국섬유패션협동조합 이사장)이 한국 기술사회가 이달중 발간하게될 산업 각 분야별 특성을 다룬 특집책자에 특별 기고한 내용이다.

전남대 섬유공학과를 졸업, 국내 굴지의 면방회사 최고 경영자를 두루 거친후 대학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섬유공학과 경영의 대가인 김 회장의 특별기고 내용을 3회에 걸쳐 전문 소개한다. <편집자 주>

 

2. 한국 섬유산업의 발전과정

2.1 섬유산업의 근대화

가내수공업 탈피, 면방산업 중심의 근대산업화, 조방과 경방

우리나라 섬유산업이 근대화되기 시작한 시기는 일제강점기였던 1917년으로 볼 수 있다. 1917년 일본 기업인 조선방직공업(약칭 조선방직, 조방)이 부산에 설립되면서 우리나라의 섬유산업은 물레와 베틀을 이용해 실과 베를 짜던 가내수공업 형태에서 벗어나 근대산업적인 규모의 생산설비를 갖추게 되었다.

조선방직은 일본 미쯔이(三井) 계열의 중외산업(주)과 우마꼬(馬越恭平), 야마모토(山本條太郞) 등이 자본금 500만 원을 출자하여 지금의 부산 자유시장 일대 13만 2000㎡[4만여 평]에 세웠다. 1919년 1월부터는 방적추 1만 5200주와 직기 610대로 생산을 시작하였다. 조선방직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방직공장으로 기록된다.

이후 1919년 김성수에 의해 경성방직(京城紡織)(주)이 설립되었다. 경성방직(주)은 설립 이듬해인 1920년 3월 서울 영등포에 공장용지 5000평을 구입하고 본사 사옥 및 생산공장을 지었고, 1922년 3월 경성직뉴 고무공장을 신설하고 12월부터 별표 고무신을 판매하였다. 경성직뉴는 1926년 1월 중앙상공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한 후 태극성과 산삼이라는 이름의 광목을 생산·판매하였다. 이어 1928년 직기 104대, 1931년 직기 224대를 증설했고, 1933년에는 직기 224대를 증설해 총 672대 규모의 공장으로 성장하였다. 1936년에는 원료인 면사의 자급자족을 위해 방적기 2만 1600추를 신규로 도입했으며, 직기도 224대를 증설하였다. 1937년에는 방적기 4000추를 증설해 총 시설 방적기 2만 5600추, 직기 860대의 생산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경성방직은 우리 자본과 기술에 의해 설립, 운영된 최초의 민족기업으로서 해방 이후 우리나라 면방산업의 성장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2.2 해방~1950년대 면방산업 건설기

한국전쟁 딛고 면방직 성장, 정부 섬유산업 육성정책이 견인

1945년 해방은 섬유산업에도 전환기를 가져왔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섬유산업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면방 시설을 중심으로 내수산업으로 발전하였다. 당시 방직 시설은 방적추 수(紡績錘數) 33만 7000추, 직기 9000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1945년 11월에는 일본 자본에 의해 경영됐던 조선방직 부산공장이 ‘조선방직관리위원회’에 이양되어 시운전을 하게 됐고, 12월에는 동양방적 인천공장이 ‘동양방적공사’로 조업을 재개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정부의 주도로 면방직, 방모, 견직 등의 시설을 민간인이 운용하게 지원하였다. 그 결과 대전방직 대전공장, 대한방직 영등포공장, 고려방직 춘천공장, 전주방직 전주공장이 새로 가동했으며, 해방 당시 일본인의 방화로 소실되었던 ‘대구방직 대구공장’도 재건되었다.

그러나 차츰 자리를 잡아가던 중에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대구·경남지역을 제외한 전국 대부분의 모든 생산시설이 파괴되었다. 전쟁으로 파괴된 방적설비는 한국전쟁 이전 낙동강 이북에 산재해 있던 시설 30만 6572추의 약 70%인 21만 7980추에 달하였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파괴된 면방직 시설을 복구하고, PL480에 의해 무상원면 등을 지원받고, 국내의 풍부하고 저렴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섬유생산력을 높여 나갔다. 1950년대 말에는 면정방기 47만 6632추, 면직기 1만 820대를 보유하게 되었고, 면사 생산 연 4만 9321M/T 및 면직물 14만 5716SM이 생산되었다. 1950년대 말 우리나라는 천연섬유(면, 모, 견 등) 제품을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1957년 대구에 나일론 공장을 세우면서, 세계적으로 인기가 높았던 화학섬유인 나일론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생산하게 되었다. 당시는 면방직에 비해 화학섬유 공업시설 기반은 전무할 때였다.

1950년대 면방직 공업의 성장은 1952년 섬유공업부흥계획, 1953년 면방직5개년계획, 1954년 직물류세 폐지, 1957년 면제품 수입 금지 등 정부의 섬유산업 육성정책 덕분이었다.

2.3. 1960~1970년대 수출전략산업화 시기

화섬산업 본격화 정부 육성산업 선정, 저렴하고 풍부한 노동력 강점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섬유산업 수출 효자 부상

1960년대 수출지향적인 섬유산업은 수입대체와 급격한 수출증대를 이루면서 국민의 생활수준의 향상과 경제의 성장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1960년대 섬유산업의 가장 큰 이슈는 나일론사의 국산화와 아크릴의 수출이었다. 한국 나일론산업의 역사는 1957년 4월에 설립된 한국나이롱이 1959년부터 12.6톤/월의 나일론 스트레치사를 생산하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한국나이롱의 나일론 스트레치사 생산은 단순히 원사를 수입해 가공하는 데에 불과하였다. 나일론사의 국산화는 1963년에 이루어진다. 1963년 8월 한국나이롱이 미국 컴텍스와 기술제휴를 통해 대구에 2.5톤/일 규모의 공장을 설립, 마침내 우리 기술로 나일론사 생산에 성공하였다.

한편, 정부는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국가경제를 되살리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한다. 이것은 전략산업을 엄선, 국가의 지원으로 적극 육성하는 정책으로 시멘트, 화섬, 전기, 비료, 제철, 정유공장이 육성 산업으로 선정되었다. 특히 강한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폈다.

나일론사의 성공과 함께 중소기업협동조합 산하 메리야스공업협회가 결성되면서 섬유산업, 특히 화섬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해외시장 개척이 시도됐다. 그 결과 1963년 초 아크릴 스웨터의 홍콩시장 수출이란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 4개월간 홍콩으로의 수출액은 1만 2000파운드였다.

나일론으로 시작된 한국의 화섬산업은 1960년대 말 폴리에스터와 아크릴이 더해지면서 더욱 성장하면서 수출전략산업이 되었다. 한국에 폴리에스터 공장이 처음 세워진 것은 1968년이다. 1968년 3월 면방업체들이 공동투자한 대한화섬이 부산에서 6톤/일 규모의 단섬유(stable fiber) 생산설비를 가동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폴리에스터사가 생산되었다. 이어 1968년 3월에는 삼덕무역이, 1969년 2월에는 선경합섬이, 1969년 12월에는 삼양사가 잇달아 폴리스에스터 생산에 들어갔다. 한국나이롱 역시 폴리에스터 분야에 진출, 일본의 동양레이온의 기술을 도입해 1971년 3월에 구미에 폴리에스터(장섬유) 생산에 돌입하였다.

비슷한 시기 아크릴, 비스코스 레이온 등의 다른 화섬도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1964년에 설립된 한일합섬이 1968년 아크릴 섬유 생산에 들어갔고, 1967년에는 태광산업이 동양합섬을 설립해 아크릴 생산에 뛰어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에 앞서 1966년에는 흥한화학(후에 원진레이온으로 사명 변경)이 비스코스 레이온 인견사 공장을 가동하였다.

1960년대 화섬산업을 이끈 기업들을 정리하면 동양나이론, 한일합섬, 코오롱, 태광산업, 고려합섬, 선경합섬, 삼양사 등으로, 이들은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장치산업으로서의 막대한 자본 확보, 적정단위 생산규모의 확립, 기술도입, 가격 안정 등의 난제를 극복해 나갔다.

나일론, 아크릴, 폴리에스테르 등 제3대 합성섬유의 생산이 가능해짐과 동시에, 저렴하고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급성장을 이룬 섬유산업은 1970년대에 이르러 본격적인 수출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1973년 우리 기업들이 생산한 합성섬유의 생산량이 10만 톤대에 도달하였다. 이 해 섬유산업은 내수 43.6%, 수출 56.4%로 수출체제로 돌아섰다. 1970년대 우리나라는 홍콩, 대만과 함께 ‘의류 수출의 빅3’로 불렸다.

면방직 생산에서도 우리나라는 1979년 세계 10위의 생산국 대열에 들어서게 됐다. 1950년대 정부의 적극적인 정책으로 산업의 기반을 닦은 면방산업은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에 힘입어 수출유망업종으로 중점 육성되었다.

1960년대를 마감하는 1969년 우리나라의 면방직 산업은 면정방기 85만 6000추, 면직기 9728대의 설비를 보유, 방적사 9만 5000M/T, 면직물 2억 372만 4000SM을 생산하였고, 면사 및 면직물의 수출실적은 1987만 6000달러에 이르렀다. 면방산업은 1970년대에 들어서도 성장일로를 달려 1979년에는 면정방기 307만 4000추, 면직기 2만 4000대를 보유하고 방적사 38만M/T, 면직물 6억 2003만 4000SM을 생산하였다. 설비와 생산에서 1970년대 10년 동안 3배 이상의 성장을 이룬 것이다. 수출은 9억8300만 달러로 50배의 성장을 기록하였다.

2.4. 1980년대 산업구조 고도화 시기

기술개발 위주 발전, 노동집약 부문 공장 해외이전 추진, 산업용 섬유 등장

1980년대는 국내 산업계로서는 격동의 시기이다. 국내에서는 중화학 공업 우선 정책이 유지되고, 선진국들이 한국의 개발도상국 졸업론을 거론하면서 국내 기업 전반에 걸친 보호조치를 완화할 수밖에 없었으며, 두 차례에 걸친 오일쇼크도 있었다. 통상정책 또한 보호주의에서 시장개방과 무역자유화로 전환됨에 따라 1986년 개별산업의 지원정책을 하나로 묶은 「공업발전법」이 제정되었다.

이에 따라 산업별 합리화 조치와 함께 섬유산업의 생산구조 개편이 이루어졌다. 기술이 중시되는 염색, 가공, 디자인 분야 및 신소재·신기술 개발에 대한 투자가 확대되는 한편, 노동운동의 심화되면서 노동집약적인 부문(봉제 및 저가 대량생산 품목)의 생산시설 해외이전이 추진되었다.

또한, 편직·봉제·염색가공시설 등에 대한 합리화 자금 지원이 이루어졌고, 신기술·신소재 개발, 염색공단 폐수처리시설 확충, 패션·디자인 교육기자재 구입 등에도 자금이 지원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1987년에는 단일품목으로는 국내 최초로 섬유산업이 수출 100억 달러를 돌파하는 기록을 세웠다.

1980년대 면방산업은 1970년대 1, 2차 세계석유파동에도 불구하고 고도성장을 이어나갔다. 설비의 증가세는 둔화되었으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시설의 합리화, 생산성 향상에 주력해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하였다. 1989년 면방산업의 규모를 살펴보면 면정방기 369만 3000추, 면직기 2만 6000대의 설비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방적사 54만 6000M/T, 면직물 10억 7251만 2000SM을 생산하였다. 수출은 19억1300만 달러의 실적을 이룩해 면제품 생산의 전성기임을 입증했으며 섬유 수출 증대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1970년대를 거치면서 산업의 기반을 다진 화섬산업은 1980년대로 들어서면서 섬유수출 산업의 주종목으로 자리 잡으면서 기술개발에도 박차를 가해 신제품의 출시가 줄을 이었다.

1983년 화섬 생산량은 10년 전의 5배가 넘는 68만 3285톤에 달했으며, 그로부터 5년 후인 1988년에는 100만 톤을 넘겨 한국은 세계 5위의 화섬 생산국이 되었다. 특히, 폴리에스터사는 최대 화섬 생산국인 미국, 일본보다 많은 생산량을 기록해 대만에 이어 2위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신기술 개발은 의류용 섬유와 산업용 섬유 부문이 함께 이루어졌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화섬 개발이었다. 신화섬이란 기존 폴리에스터와 나일론 등의 화섬에 각종 첨단 가공기술을 접목하여 천연섬유 가운데 가장 뛰어난 물성을 갖는 실크보다 기능이 앞서는 섬유를 만들어낸 것을 말한다. 1980년대 중반부터 개발이 본격화된 신화섬으로는 복합사, 마이크로 화이버, 이수축혼섬사, 제전사 등 차별화 원사와 이를 사용한 각종 직물 등이 있다. 화섬의 첨단기술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산업용 섬유 기술 개발로는 1984년 효성이 국내 최초로 도전성 섬유를 개발, 1989년에는 나일론 66 중합설비를 사용해 카펫 용도의 나일론을 생산한 BCF(Bulkey Continuous Filament) 기술 등을 개발해 생활용, 산업용 섬유기술을 확립하였다. 1988년에는 태광산업에서 탄소섬유를 생산하기도 하였다.

1987년 충남방적에서도 ‘적외선 위장가공직물(赤外線 僞裝加工織物)’ 개발이란 기술적 쾌거를 이루었다. 적외선 위장가공직물이란 적외선 감시 카메라로도 식별되지 않는 직물로, 특수부대원들의 군복을 만드는 소재이다. 1987년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이 적외선 위장가공직물을 생산할 기술이 없었다. 세계적으로도 미국, 프랑스, 이스라엘만이 생산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터라 우리 군에서는 미국에서 직물을 수입, 위장복을 만드는 실정이었는데, 필자가 재직하고 있던 충남방적기술연구소에서 이 소재 기술의 국산화에 성공한 것이다.

충남방적기술연구소는 우리나라 최초, 유일의 섬유연구소였으며, 필자는 이 연구소의 초대 소장이었다. 당시 필자는 페퍼포그 생산업체인 삼영화학의 상무이사의 제안을 받아 기술 개발에 돌입, 6개월 만에 원천 기술을 개발해냈다. 이 기술의 개발로 100억 원이 넘는 수입 대체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필자는 이 기술 개발의 공을 인정받아 대한민국과학기술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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