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65)이 지난 7일 파리 16구에 있는 자신의 살롱에서 기자 회견을 갖고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이 직업에 고별인사를 하는 날로 오늘을 선택했다"며 전격적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오는 22일 오후 6시 조르주 퐁피두 센터에서 회고전을 겸한 마지막 패션쇼를 갖겠다고 밝혔다. 이브 생 로랑 은퇴선언에 프랑스 떠들썩이브 생 로랑이 은퇴를 발표하자 온 프랑스가 떠들썩하다. 르몽드와 르피가로를 비롯한 거의 모든 신문과 방송들은 그의 은퇴를 머리기사로 다뤘으며, 파리 시민들도 16구에 위치한 그의 살롱에 몰려와 '현대 패션의 모차르트'라고 불린 그의 퇴장을 아쉬워 했다고 한다. 그가 은퇴함으로써 그가 설립했던 이브 생 로랑 패션 하우스가 출범한지 40년만에 문을 닫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놓여 있는데, 프랑스 언론들은 그의 은퇴를 20세기 전통적, 순수 디자인 시대의 종말을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디자이너 한 사람의 은퇴에 프랑스 전체가 이처럼 법석을 떠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대적이고 신선한 디자인으로 세계 패션계 풍미알제리 태생의 이브 생 로랑은 18세에 국제양모사무국이 주최한 디자인 컨테스트에서 드레스 부문 1등을 차지할 정도로 뛰어난 퍠션감각과 예술적 감각을 소유한 디자이너로, 53년에 크리스티앙 디오르社에 입사해 두각을 나타낸 뒤 독립, 62년 파리에 이브 생 로랑 패션 하우스를 열었다. 그는 현대적이고 신선한 디자인으로 60년대를 정점으로 세계 패션계를 풍미했는데, 여성 바지 정장을 처음 도입했으며 그가 창안한 야회복 재킷인 턱시도는 멋과 스타일의 고전으로 인정받고 있다. 83년에는 살아있는 디자이너로는 처음으로 그의 디자인 세계를 조명하는 패션쇼가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열렸으며, 85년에는 고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으로부터 최고 영예의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는 등 프랑스의 국보적인 존재로 존경을 받아왔다. 구치와의 갈등과 세계패션조류의 변화가 은퇴 원인?이와 같이 문화강국 프랑스의 자존심이자 상징적 존재였던 이브 생 로랑이 전격적으로 은퇴를 선언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기자들과의 질의답변없이 미리 작성한 성명서를 통해 지난 몇 년간 우울증을 앓았다고 말했을 뿐 구체적인 은퇴사유를 밝히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패션계는 이브 생 로랑 패션 하우스와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는 세계적인 패션기업인 구치와의 갈등, 세계패션조류의 변화 등을 그의 은퇴 배경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브 생 로랑이 1999년 회사를 구치에게 매각함으로써 미국인 디자이너 톰 포드의 주도로 이브 생 로랑 기성복 라인과 화장품, 장신구 등이 판매되고 있는데, 이브 생 로랑은 구치가 YSL 브랜드를 운영하는 방식을 못마땅해 했으며 구치는 거액의 YSL 로열티 지급에 난색을 표해 양측의 갈등이 심화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구치 소유주인 프랑수아 피노가 별도로 인수한 이브 생 로랑 오트쿠튀르는 이브 생 로랑을 디자인 책임자로 두고 경영을 해 왔으나 적자를 면치 못했다고 한다. 또 이브 생 로랑의 오랜 동업자인 피에르 베르주는 세계 패션계의 동향이 더 이상 자신에게 맞지 않다는 생각이 그로 하여금 은퇴를 결정하게 만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미 디오르와 지방시를 비롯한 권위있는 패션 하우스에서는 몇 년 전부더 디자이너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특히 지방시는 살아있으면서도 1995년에 은퇴를 선언하고 젊고 재능있는 디자이너로 하여금 패션 하우스를 계승하도록 했는데, 그것은 바로 새로운 고객층을 끌어들이기 위한 비즈니스 전략의 하나였다. 하우스의 고객이 계속해서 새로운 세대로 이동하고 있기 때문에 디자이너의 세대교체는 당연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어쩌면 이브 생 로랑의 은퇴 선언은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았나 싶다. 특히 지방시, 겐조와는 달리 후계자를 선정하지 않은채 은퇴를 선언함으로써 이브 생 로랑의 오트쿠튀르가 계속해서 존속할 수 있을지는 아직은 미지수다. 디자이너는 부가가치 창출해야 생존할 수 있어 이브 생 로랑의 은퇴를 보면서 브랜드의 캐릭터나 기업의 경영방침에 적절한 디자이너를 선정하는 일이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유지·발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디자이너가 기업의 요구에 얼마만큼 부응하는냐는 디자이너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된다. 그동안 관심을 끌어온 CJ39쇼핑과 디자이너 그룹 IIDA의 만남이 드디어 첫 번째 꽃을 피우려는 순간에 있다. 조영철 사장은 "IIDA 사업을 통해 국내 톱디자이너 브랜드의 대중화를 이루는 한편, IIDA 디자이너들이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후원하겠다"고 말했다. 그동안 디자이너의 재능과 기업의 자본 제휴가 거의 실패로 끝이났기 때문에 이들의 만남에 대해 '약속했던 조항을 그대로 이행할까?', '과연 디자이너들이 기업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을까?'와 같은 의문들이 무성하다. 그러나 동경이 세계 5대 패션도시로 각광받게 된 것은 정부와 기업의 적극적인, 그리고 지속적인 지원을 받은 이세이 미야케와 다카다 겐조, 요지 야마모토, 하나에 모리 등 국제무대에서 일본패션을 알린 디자이너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도 패션 세계화를 위해서는 정부와 기업이 해외서 활동하는 디자이너를 적극 지원 육성해야 한다. 분명 과거에 비해 대기업과 전문 디자이너들의 만남이라는 바람직한 움직임들이 활성화되어 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서 디자이너들이 간과해서는 안되는 사실이 있다. 외국에서 이름을 걸고 컬렉션을 한다는 것이 생각만큼 달콤한 일만은 아니다. 파리에서 혹은 밀라노에서 진정 그들만의 색깔을 가지고 당당히 그들에게 문화적 충격을 던져 줄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 오히려 국제무대에 나가서 망신만 당할 수도 있다. 세상은 넓다. 그러나 우리는 어디든 갈 수 있고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으며 판단할 수 있다. 그곳에서 그들이 어떠한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은 언론보다도 우리 소비자들이 더 빠르게, 더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겨 진정한 의미의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었으면 한다. 이미숙(전남대학교 의류학과 전임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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