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 50돌 희망 충전... 100년 비전 쾌속질주 '자신감'

박 회장 하나님의 자녀 청지기 신념, 장대한 비전 프로젝트 선언
구랍 14일 신라호텔서 1천명 운집 ‘50년의 믿음 100년의 비전’ 선포
수출·내수 쌍끌이 견인 글로벌 초일류 의류패션기업 도약 원대한 꿈 실현할터
5천명 신학생 지원 5천개 개척교회 성원 국내는 물론 네팔에 130개 교회 설립한 장로
“내가 한일은 아무것도 없어 오직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것” 국가 조찬기도회장 역임
의류산업협회장, 섬산련 회장 역임, 섬유패션산업 발전혁신상 거목, 영원한 현역

한국경제 발전의 일등공신인 의류수출이 국내 산업의 공동화로 인한 흑역사가 되고 말았다. 반세기전 이 땅의 빈곤퇴치의 주역으로 경제발전을 견인하던 의류수출 산업이 소멸의 역사로 반전한 것이다.

이른바 직물제의류, 메리야스, 스웨터로 대별되던 섬유제품 산업이 이 땅에서 조종을 맞은지 강산이 3번 바뀌었다. 삼도물산, 협진양행, 쌍미실업, 그리고 대우에 이르기까지 한국경제를 견인하던 기라성같은 기업들이 사실상 모두 공중분해됐다.

장강의 뒷물이 앞물에 밀려나는 자연의 순리처럼 고비용 저효율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처참하게 붕괴됐다. 하지만 불가사의한 예외가 있다.

지난 73년 스웨터 수출로 시작한 (주)신원은 모진 풍파에도 끄떡없이 안정성장을 유지하며 글로벌 의류패션기업으로 우뚝 서있다. 창업자인 박성철 회장(84)의 기도로 시작된 믿음기업은 차돌같은 50년의 명성을 바탕으로 100년의 비전을 선포하고 있다.

박성철 회장은 한국 의류수출업계 역사의 증인이자 신화적 입지전적인 기업인이다. 스웨터 수출로 시작해 대형 의류벤더로 일취월장하면서 내수패션업계의 선구자적 기업인이다.

구랍 14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50년의 믿음, 100년의 비전’을 슬로건으로 창사 이래 최대 규모인 창립 50주년 기념행사를 마친 박성철 회장을 만나 갑진년 신년대담을 가졌다.

 

(주)신원이 구랍 14일 신라호텔에서 창사 이래 최대행사인 아주 특별한 창립 5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습니다. 평생을 ‘하나님의 자녀 청지기’를 자임하며 믿음의 기업을 추구해온 회장께서 어려운 시기에 매머드 행사를 기획한 동기가 있습니까.

“50년이면 강산이 5번 변한 유구한 역사입니다. 아시다시피 한국경제 부흥의 일등공신인 크고 작은 섬유제품 회사들이 거의 소멸된 기구한 상황에서 저희 신원은 모진 비바람을 극복하고 기적처럼 글로벌 의류패션기업으로 우뚝 섰습니다.

이 모든 쾌거는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이제 다시 미래 100년의 도약을 선포하면서 국내외에서 땀흘리는 신원 가족 5만명의 굳건한 신앙속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소박한 마음에서 준비한 것입니다. 회사 임직원과 기독교계 인사, 정·재계, 각계 각층에서 열띤 성원을 보내주셨습니다. 성원해주신 모든 분들게 감사 드립니다.”

기념예배에 앞선 식전행사때 여야 정계 원로를 포함해 종교계 인사, 언론계 등 거물(?)들이 대거 참석해 파란만장한 회장님의 족적에 찬사와 갈채가 이루어졌습니다. 직감은 했지만 회장님의 보폭이 얼마나 넓은지 새삼 실감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지난 50년 신원의 역사속에는 모진 긴 겨울도 있었고 깊은 어둠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이 위기극복의 기적을 내려주셨고, 이번 행사에 참석해주신 정·재계, 기독교계, 언론계 인사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항상 마음의 빚으로 간직하고 교류하는 분들입니다. 특히 제가 국가조찬기도회장을 역임하면서 진영과 무관하게 여·야 정치권 인사들과 두루두루 협력관계를 유지해온 겁니다. 오직 신앙으로 소통하고 협력하고 있지요”

그날 원로목사 다수와 회장님이 장로로 시무하는 신길교회 원로·담임목사들께서 공개해서 알았습니다. 평생 5000개의 개척교회를 지원하고 5000명의 목회자 장학생을 후원했으며 100개 교회를 설립하셨다는 업적에 참석자들이 감동과 함께 숙연해졌습니다. 말이 쉽지 아무나 가능한 일인가요.

“신원 창립 당시 하나님 앞에서 6가지 약속을 했지요. ‘매일 새벽기도를 드리고, 본예배에 빠지지 않을 것이며, 1년에 100명을 전도하겠습니다’라고, 또 ‘십일조를 철저히 이행하고 가난한 신학생 100명이 목사님 될 때까지 도울것이며 100개 이상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지했요’ 이미 국내뿐 아니라 네팔에 130개 교회를 설립해 잘 운영하고 있어요. 100년 기업의 신원의 비전은 계속 빠르게 진화할 것입니다.”

하긴 회장님은 동토의 나라 북한의 개성공단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십자가를 세운 기적을 만드셨습니다.

“남북 교류의 상징인 개성공단이 폐쇄된 지 어느덧 7년이 됐습니다만 북한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저의 절실한 사명이자 염원이었어요. 개성공단 신원공장 2층에 예배실을 만들고 십자가를 거는데 많은 협박과 방해가 있었지만 결국 해냈습니다. 북한 관계자들이 공장 보일러실에 불을 지르는 온갖 악행이 거듭 됐지만 결국 하나님이 해주셨습니다. 동토의 나라 북한에서 십자가를 걸고 북한 역사 최초로 개성공단에서 패션쇼를 열었으니까요. 저희는 지금 이순간도 베트남·인도네시아·과테말라·니카라과 4개국 해외공장 7개 법인에서 매주 월요일 아침 예배를 시작으로 업무가 이루어집니다. 5만명 신원 가족들이 기독교 신앙을 믿고 충실히 근무해 생산성이 타사보다 훨씬 높다고 자부합니다.”

화제를 바꿔 회장님은 한국의 대표적인 기독 실업인이면서 한국스웨터조합 위원장, 한국의류수출협회장, 한국섬유산업연합회장 등 명실공히 섬유패션산업 수장(首長)을 역임하셨습니다. 의류패션 기업인으로서 가장 보람된 기억이 있으시다면 한가지만 예를 들어 주시죠.

“개인적으로는 스웨터 수출 역사상 가장 빠른 시일에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한 것을 비롯 과분하리만치 여러 영광스런 일이 너무 많습니다. 섬유업계 수장으로서 정부와 직접 담판해 ‘프리뷰인 차이나(상하이)’를 개최해 한국 섬유패션의 중국 교두보를 구축한 점이나 섬산련 재정이 어려워 현 섬유센터 매각위기를 정부와 조율해 이상없이 유지하게한 점 등은 지금도 보람으로 느낍니다. 그런 한편 지난 79년 한국 스웨터 수출이 승승장구하던 시절 미국이 뜬금없이 한·대만·홍콩 3국 스웨터 제품에 반덤핑 제소를 해 통상마찰이 심각했지요. 그중에서도 미국측은 수출량이 가장 많은 한국산 스웨터를 집중 타겟으로 삼아 신원을 비롯한 5개업체가 강도 높은 실사를 받아 업계가 존폐위기에 몰렸어요.”

당시 승소 가능성이 전무했던 그 지루한 싸움을 회장님의 주도로 승소하지 않았습니까.

“당시 나는 섬유제품수출조합 스웨터 위원장을 맡고 있었고 반덤핑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선출돼 무려 4년동안 매일같이 대책회의를 열고 소송을 진두지휘했어요. 이 과정에서 대만과 홍콩은 고율의 덤핑관세를 얻어맞고 대미 스웨터 수출을 포기했어요. 다행히 한국은 신산고초 끝에 그 어려운 소송에서 기적같이 승소해 제2 전성기를 구가한 겁니다. 이것이 동기가 되어 한국의 니트의류 수출이 본격적으로 번성했고 지금 글로벌 벤더들의 탄생에 원동력이 된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당시의 고통과 희열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습니다.”

기업마다 부침이 따르고 성장과 퇴영의 반비례 현상이 따릅니다. IMF 외환위기란 국난을 겪으면서 신원도 심하게 흔들린 흑역사가 있습니다. 왜 그랬었나요?

“의류패션사업을 천직으로 알고 선택과 집중해온 신원이 다각경영의 덫에 걸렸어요. 건설·전기·화학·골프장 등 16개 계열사로 확장하면서 불가피하게 차입경영에 의존한 겁니다. 아뿔싸 IMF란 청천벽력같은 국난이 발생하면서 달러당 800원대이던 환율이 어느날 1600원~1800원으로 폭등했어요. 회사가 빌린 원금이 2배로 불어났고 이자율도 36%까지 치솟았어요. 1억5000만 달러가 넘는 외화부채로 인해 신원그룹도 공중분해 위기를 겪은 것입니다.”

당시 기라성같은 기업들이 워크아웃에 편입된후 기업이 해체되고 총수가 감옥에 가는 소용돌이에 휘말렸습니다. 용케도 신원은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 가장 빨리 워크아웃을 졸업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기업을 경영하다 보면 확장경영의 유혹을 좀처럼 뿌리치기 어렵습니다. 승승장구 일취월장만 보였지 IMF로 가는 저주의 동심원을 보지 못한겁니다. 이를 악물고 혀를 깨물며 자식같은 계열사를 전부 매각해 모든 부채를 상환하고 의류패션사업 하나만 남긴겁니다. 금융권 채권단에게도 조금도 피해를 주지않고 상황을 완료해 5년만에 가장 먼저 지긋지긋한 워크아웃을 졸업한 겁니다. 경영철학이자 신념인 하나님의 자녀 청지기 정신으로 의류패션 한우물을 팠으면 신원을 ‘자라’나 ‘유니클로’ 규모로 키웠을텐데 후회가 막급했지요. 다시 글로벌 일류 의류패션기업으로 정진할 겁니다.”

신원은 가장 건강하고 훌륭한 2세 경영체제를 구축했다는 것이 재계의 평가입니다. 아직도 경영에 훈수를 많이 하십니까.(웃음)

“장남은 목사님이고 둘째와 셋째가 내수와 수출을 맡아 잘 경영하고 있어요. 나는 매일 4시 집에서 나와 새벽기도를 올리고 회사에 오전 6시에 도착합니다. 주요 경영사항을 보고 받고 베트남·인니·과테말라·니카라과 법인과 통화하면서 생산현장을 체크합니다. 오전 업무가 끝나면 주님 사업에 매진하는 일과지요”

50주년 기념 슬로건이 ‘50년의 믿음, 100년의 비전’ 이었습니다. 100년을 향한 신원의 청사진을 압축해주시죠.

“신원의 사업구조는 의류수출과 패션의 양대 축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앞으로 명실상부한 글로벌 패션기업으로 웅비하면서 초일류 의류벤더를 지향하기 위해 세계 각국에 생산기지를 다양하게 구축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대형 유통회사와의 철통같은 협업체제를 정착시키기 위해 베트남과 인니 등의 생산기지 고도화는 물론 중남미에 편직, 염색, 봉제 그리고 면방까지 과감한 투자를 통해 바이어 신뢰를 확대할 겁니다. 인적·물적 투자를 과감히 확대해 그야말로 글로벌 일류 의류패션기업으로 도약할 겁니다.”

끝으로 회장님이 금과옥조로 여기신 경영철할중엔 ‘하나님의 자녀인 청지기 역할’을 강조하십니다. 가난하고 그늘진 곳에 각별한 관심과 애정의 원천이 어린 시절 모진 고생때문인가요.

“아시는분들은 알고 계시지만 전남 신한 섬마을에서 태어나 배고픈 설움을 뼈저리게 새기며 살았습니다. 목포에서 중고교를 졸업하고 한참후 한양대에 진학하는 동안 세상 사는 설움중 배고픈 설움이 가장 크다는 것을 몸소 체험한 삶이었으니까요. 기업경영을 통한 사회환원 정신이 강한 이유도 어린 시절의 뼈에 사무친 고생이 영향을 준것도 사실이지요.”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 더욱 건강하시고 소망 이루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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