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曺永一 칼럼] 평화롭던 섬유패션업계 ‘분열상’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것이 역사다. 시계 초침이 거꾸로 가는 형국이다. 온 나라를 뒤흔든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출을 둘러싼 국론분열이 532년전 조선시대 상황을 똑같이 재현하고 있다. 1591년 당시 조선은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나뉘어 지금처럼 허구한날 당파 싸움을 벌였다. 바로 1591년 일본을 정탐하고 온 서인 황윤길은 “일본이 침략 준비중”이라고 조정에 보고했다. 반면 동인 김성일은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조정은 전쟁이 코앞인 위기상황도 평화라고 우길만큼 지록위마(指鹿爲馬)에 빠져 있었고 결국 침략을 당했다.

정부·여당은 원자력안전위의 현장 점검 결과를 토대로 “문제가 없다”며 야당의 괴담전파가 가짜뉴스라고 맹공하고 있다. 야당은 일본 현지 점검 결과 “오염수를 배출하면 바다를 죽이고 어민을 죽인다”고 각혈하며 반격하고 있다. 심증은 가지만 확증이 없는 상황에서 어느쪽이 맞는지 국민은 헷갈린다. 정치권의 사사건건 자가당착과 적반하장에 국민도 두쪽으로 갈렸다. 대화는 사라지고 일방적 우격다짐만 난무하는 행태에 국민의 마음은 화석으로 변했다.

상저하고(上底下高) 기대 무너진 섬유패션

본질 문제로 돌아가 글로벌 경제의 ‘상저하고’ 기대가 무너지고 있다. 우크라 전쟁의 장기화와 가장 큰 동력인 중국시장의 ‘리오프닝’이 맥을 못추고 있다. 실제 하반기 회복을 낙관했던 반도체 D램 경기가 바닥은 찍었지만 소강상태이고 배터리 등 신 주력산업도 안갯속이다.

세계 경제의 견인차인 이들 주력 산업이 힘이 부친 상황에서 곁불을 쬐는 섬유패션산업이 고통스럽게 열패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흐름이다. 실제 글로벌 섬유패션경기가 상반기에 이어 하반기에도 회복가능성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일부 증권가 애널리스트들이 미국의 대형 유통업체 재고가 많이 소진돼 하반기 벤더들 오더 상황이 회복될 것으로 전망하기도 했지만 이것은 지나친 낙관론이다.

미국 시장의 올 겨울 홀리데이 오더는 이미 끝난지 오래이고 내년 S/S 오더도 사실상 마감됐다. 올 홀리데이 오더는 실망 그 자체이며 내년 S/S용도 성적표가 기대에 훨씬 못미치고 있다. 물론 룰루레몬같은 요가복 브랜드 등 극소수는 매출 호조가 이어지고 있으나 월마트·타겟·갭을 비롯한 공룡 유통업체의 오더량은 형편없이 줄었다.

실제 해외에 대규모 소싱공장을 운영하는 의류벤더들이 내년 S/S용까지 포함한 오더 상황이 작년보다 30% 내외씩 급감해 비상이 걸렸다. 미국 대형 유통바이어로부터 수주한 오더량이 급격히 줄어든데다 단가마저 작년비 20% 내외나 깎여 울상이다.

지난 30년간 승승장구하며 섬유업계 삼성전자로 평가받던 ‘빅3’를 비롯한 의류벤더들마다 올 수출이 작년비 30%씩 감소돼 깊은 시름에 빠져 있다. 회사 수익의 황금알이었던 해외 소싱공장이 이제는 큰 짐이 돼 눈덩이 적자를 본사 사업부가 메꿔야 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됐다.

크고 작은 벤더중 상당수가 이미 해외 하청 협력공장을 정리한데 이어 자가공장 현지법인 축소전략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1000개 가까운 한국 섬유업계가 진출한 베트남에서 이같은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벤더들의 실적 부진은 득달같이 원단 밀들에게 전가돼 편직·염색 원단 밀들이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2021년 7월부터 무차별 셧다운으로 공급망이 붕괴된후 미국 대형 유통바이어들의 경기침체에 따른 오더 감소로 벤더와 바늘과 실의 관계인 원단 밀들이 폭탄을 맞은 것이다. 베트남의 무리한 당시 셧다운 사태로 인한 오더 가뭄의 부작용은 이번 윤석열 대통령의 국빈 방문시 베트남 주석과 투자청 장관들에게까지 한국 경제사절단이 직접 지적할 정도로 큰 실책이었다.

원자재 업계도 매한가지다. 벤더와 니트 원단 밀의 오더 가뭄은 원사 공급자인 면방업체에 직격탄이 떨어진지 오래다. 국내는 물론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면방업체들의 작년 가동률이 대부분 50% 내외이던 것이 올해도 회복되지 않고 있다. 지난 2~3월에 반짝하던 현지 면방업체 가동률이 더욱 줄어 30% 내외에 불과한 공장이 있을 정도다. 물론 면사 가격도 폭락해 작년 상반기까지 고리당 950달러(코마30수)까지 치솟던 가격이 570달러도 무너질 상황이다.

여기에 국내 화섬산업은 TK케미칼과 성안합섬의 사업 정리과 법정관리 이후 사실상 중국 손아귀에 들어가 눈덩이 적자속에 생존이 가물가물하다. 대구 화섬직물업계는 지금까지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화섬사 수급불안에 마의 여름 비수기가 예년보다 한달 이상 빨리 다가와 헉헉거리고 있다. 경기 니트직물업계도 생사기로속에 염색·프린트 업체들의 줄도산이 이어지고 있는 초상집 상황이다.

이같이 섬유스트림 전반이 불구덩이 속으로 타들어가는 상황에서 국내에서 섬유 제조업을 하는 거의 전 업체가 생존에 위협을 받고 있다. 인력난과 고임금, 감당하기 어려운 에너지 비용, 고비용 저효율 구조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 놓여 있다.

문제는 옹기짐 지고 가다 자갈밭에 구르고 있는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한 길이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극한 위기에 몰린 섬유산업을 기사회생 시키기 위한 각고의 비책이 지금 당장 필요하다.

입에 써도 몸에 좋은 산지 고언(苦言) 들어야

그 전면에 용기있는 지도자의 등장이 절실하다. 진정한 봉사정신으로 섬유산업을 기사회생 시키기 위해 전력투구할 지도자가 요구되고 있다. 난세에는 영웅이 필요하고 위기에는 살신성인 각오의 지도자가 필요하다. 지금의 산업 위기를 극복하는데는 구조고도화를 위한 정부의 파격적인 지원이 발등의 불이란 점에서 실무차원의 의례적인 건의서 정도로 해결될 상황이 아니다. 때로는 장·차관, 대통령실, 정치인들을 설득하며 경우에 따라 떼를 쓸 수 있는 용기와 강단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그 전제는 평소 다양한 인맥과 채널을 확보하고 있는 기업인이 적임자다.

때마침 섬유패션업계 수장인 이상운 현 회장 임기가 8월 18일로 만료돼 후임 선임 절차가 진행중이다. 역대 섬산련 회장 선출때와 달리 이번에는 대구와 부산, 경기 등 섬유산지의 관심과 주장이 아주 특별하다. 산지의 생명력이 그만큼 절박하고 가물가물하기 때문이다.

지역별로 수백명의 업계 지도자와 대표가 서명 날인한 연판장까지 이상운 회장에게 전달됐다. 이들의 합리적인 요구를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다. 회장 선출을 위임받은 5인 추대위원들의 사려 깊은 성찰과 판단이 요구된다. 평화로운 섬유패션업계에 두쪽날 분열상은 안된다. 입에 쓰지만 몸에 좋은 고언(苦言)은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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