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曺永一 칼럼] 차기 섬산련 회장 ‘필요충분 요건’

죽음의 계곡으로 추락하고 있는 섬유산업의 끝은 어디인가. 70년 섬유산업사를 돌아보면 긴 겨울이 있었고 깊은 어둠도 많았지만 지금처럼 벼랑 끝에 몰린 적은 없었다. 기업의 목적은 이윤추구라고 하지만 돈을 더 벌거나 못버는 차원이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 기로에 서있다. 섬유산업은 고임금·인력난의 고비용 저효율 구조에서 오래전 하산길에 들어서면서도 고래 심줄보다 강한 생명력으로 버티어 왔다.

계란을 쌓아 놓은 누란지위(累卵之危)의 위험 속에 조마조마가 만성이 돼있으나 이제는 섬유산업 전반에 천둥번개가 치고 있다. 이 산업이 불구덩이 속으로 타들어 가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길은 보이지 않고 뜻은 모이질 않고 있다.

하지만 우리 경제의 젖줄이자 기간산업인 섬유패션산업의 존립 목적과 중흥의 당위성은 차고 넘친다. 아직도 전 산업중 가장 많은 제조업체 수와 고용 규모가 웅변으로 말해 주고 있다.

대구· 경기에만 2만2천개 섬유기업 존립

섬유산지 대구경북에는 제직과 염색, 사가공, 봉제, 패션 등 1인 이상 섬유기업이 아직 8568개사가 있다. 이를 10인 이상으로 압축하면 1035개사다.

종업원 수는 1인 이상 기업이 4만5148명이다. 10인 이상 기업 종업원은 2만6859명이다.(자료 대경섬산련)

또 다른 산지 경기도에는 더 많은 1인 이상 섬유기업이 1만3260개사다. 10인 이상은 1305개사에 달한다. 종사자 수는 1인 이상이 6만722명, 10인 이상은 2만3391명(자료 경기섬산련)이다.

부산 지역 신발과 신발용 섬유회사와 봉제업체, 서울 지역은 제외한 숫자다.

대구경북과 경기 지역 양대 산지에만 1인 이상 기업이 2만1828개, 10인 이상 2340개사가 군웅할거하고 있다. 2개 지역 종업원 수는 11만5970명이다.

국가 경제 깊숙이 자리잡은 이 많은 섬유기업이 거덜났을 때 경제는 물론 사회적 혼란은 상상을 초월할 수밖에 없다. 사양이란 모진 풍토병을 극복한 저력이 그대로 확인된다.

그러나 아무리 생명력이 강한 섬유산업이라 하지만 장강의 뒷물이 앞물을 밀어내듯 시대의 흐름에 따라 필연적인 축소지향은 거역할 수 없음을 부인할 수 없다. 대구뿐 아니라 경기지역 섬유업체들이 이미 줄초상의 돌림병에 걸려 아비규환이다.

지난주 경기 양·포·동에서 내놓으라 하는 염색가공업체중 40년 이상 경영해온 업계 지도자 한분과 오랜만에 안부 인사를 나눴다. 침염과 날염 2개 공장을 운영하다 지난 4월 날염공장을 포기하고 공장 한군데만 운영하고 있는 기업인이다.

그는 다짜고짜 “하루라도 빨리 문 닫는 것이 살길입니다”라고 호소했다. 올들어 1분기에 적자가 눈덩이처럼 쌓여 “사재 40여억원을 투입했으나 백약이 무효여서 종업원 월급을 며칠 미루었다”고 말했다. 득달같이 간부들이 회사 출근을 거부해 분통이 터져 그길로 4월초 50명 직원이 근무한 공장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더욱 억장이 무너진 것은 “출근거부를 한 회사 간부들이 당시에는 야속했지만 지금은 그들이 은인”이라고 강조했다. 당시에 “회사 고통분담을 위해 정상근무를 했다면 자신의 성정상 문을 닫을수 없었는데 출근 거부덕에 홀가분하게 문을 닫아 살게 됐다”는 기막힌 소회를 털어놨다.

이것이 지금 섬유산지 경기도뿐 아니라 대구경북이 동일하게 처해있는 ‘주식회사 한국섬유산업’의 현 주소다. 지금 이순간 벼랑 끝에 몰려 줄초상 돌림병을 호소하고 있는 우리 섬유산업의 실태다. 업스트림인 화섬산업이 와르르 무너지고 섬유재벌 태광산업이 70년 모태사업 한국 최대 면방사업체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극한상황에 와있다.

이같이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을 어떻게 극복할지를 놓고 업계가 생각이 갈려있고 목소리마저 달라지는 안타까움이다. 각자도생 시대에 죽고 사는 것은 기업 자신의 문제임을 부정하거나 거역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기업이 백방으로 노력을 해도 도저히 힘에 부칠때는 정부가 손을 써서 산업을 기사회생 시키는 것은 당연한 원리다.

아직도 관치경제체제인 우리 현실에서 산업이 붕괴되면 정부가 응급처방을 내리는 것은 특혜가 아닌 순리다. 전 산업의 젖줄 역할을 하며 정작 자신의 몸이 골골해진 분야를 정부가 지원해 보신시키는 응급처방이 절실하다. 반도체·배터리·조선을 비롯한 대기업이 주도하는 산업도 정부가 천문학적인 지원을 펼치고 있지 않은가. 반도체보다 시장규모가 5배인 섬유패션산업을 제대로 지원 육성하면 전후방 산업이 아직 탄탄한 섬유패션산업의 전도는 양양하다.

그럼에도 “선무당 사람잡고 반푼수 집안 망친다”고 백면서생들이 “섬유는 사양산업이니 한계”니 하며 미운 오리 취급하는 것이 현실이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이같은 경도된 사고양태의 정부정책을 바로 세워 구조고도화를 앞당겨야 할때다. 이번 밀라노 ITMA에 출품돼 주목받은 첨단 자동화 기종도 많이 들여오고 신소재 개발과 R&D개발, 해외 마케팅력을 확대하면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다. ‘소가 언덕이 있어야 비비듯’ 정부가 반도체·배터리·조선 산업의 절반, 아니 10분의 1만 지원해도 판도가 달라질 수 있다.

문제는 누가 선봉장이 돼 정부를 설득하고 채근하며 업계에 통큰 지원을 얻어내느냐에 달려있다. 소명의식 강한 헌신적이고 담대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달라진 대구산지 여론 비장하다

때마침 섬유패션업계 수장(首長)인 한국섬유산업연합회장 선출이 진행되고 있다. 수장의 능력과 역할에 따라 섬유패션산업의 판도가 달라진다는 냉철한 사고에 근거해 선택해야 한다.

차기 섬산련 회장 선출에 대구와 경기, 부산 산지가 눈에 핏발을 세우며 역대에 없는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망망대해 편주처럼 태풍속에 표류하고 있는 미들스트림을 살릴 구원투수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이같은 염원에도 불구 지난 31일 선출한 회장 추천 5인 위원회를 보고 실망과 우려속에 부글부글 끓고 있다.

지금 섬유패션산업은 태평성대가 아니다. ‘죽느냐 사느냐’ 불구덩이 속에 타들어가는 섬유패션산업을 기사회생시킬 용기있는 구원투수가 필요하다. 하고 싶다고 아무나 시킬수 없다. 소신과 강단있는, 그리고 대정부 교섭력과 추진력 강한 지도자를 선택해야 한다. 이번에야말로 대구와 부산, 경기지역 섬유산지가 바라는 섬유패션산업 수장을 뽑아야 한다. 만약 이같은 소망과 염원이 무산되면 섬유산업계가 두조각으로 갈라질 수 있는 심각한 분위기다. 5인 위원회가 심사숙고해 산지 여론을 제대로 수렴하길 바란다. 대구·경기·부산 산지 없는 섬산련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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