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달· 스승의날에 애틋하게 떠오르는 사람

가까운 사람들의 부음을 듣는 일은 늘 비감하다. 더구나 오랜 세월 연을 맺어오며 같은 길을 걸었던 이들을 떠나보내는 일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작년 1월 신문에 난 부고기사 역시 내 마음을 덜컹하게 했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무한히 그를 그리고, 내가 섬유인으로 살아오면서 그와 맺었던 인연을 곱씹게 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추모의 정을 풀어 놓을 수밖에 없게 했다.

나의 마음을 오랫동안 무겁게 한 소식은 일신방직(주) 김창호 회장의 부음이었다. 2022년 1월 10일, 그가 소천한 날이다. 1935년생이니 향년 87세였다.

김창호 회장과의 인연은 60여 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1960년, 대학을 졸업한 내가 일신방직(주)의 전신인 전남방직(주)에 입사한 해다. 김창호 회장은 당시 전남방직의 실질적인 창업주였던 김형남 회장의 장남이다.

우리 둘의 인연을 이야기할라치면 우리나라 섬유산업의 역사가 자연스레 나올 수밖에 없다.

일신방직, 김형남 회장에 의해 태어나다

내가 섬유인으로서 첫발을 디딘 곳이 전남방직(주)이다. 그곳에서 김형남 회장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김형남 회장은 해방 이후 미군정에 의해 일제 강점기 ‘가네보(鐘紡: 鐘淵紡績)’라고 불렸던 종연방적의 관리책임자로 임명되면서 섬유산업에 투신한 분이다.

전라남도 광주에 위치한 종연방적은 해방 후 적산 시설로 미군정에 귀속됐다가 전남방직공사로 바뀌었다. 미군정은 김형남 박사를 전남방직공사의 공장장으로 임명했다.

한국전쟁 중인 1951년 김형남 사장은 전남방직공사를 불하받았다. 김형남 사장은 탁월한 경영능력을 발휘하여 회사를 비약적으로 성장 발전시켰다. 하지만 전남방직을 불하받을 때 자금이 부족하여 불하금의 50% 정도를 신한제분에서 끌어오게 되었는데, 이것이 갈등의 소지가 되었다. 1960년 4.19혁명 이후 노사분규가 더욱 심화되자, 김형남 사장과 신한제분(김용주)은 각각 회사를 둘로 나누어 분리하게 되었다.

규모가 큰 전남방직 본 공장 큰 건물 한 동을 둘로 나누고, 방적기 등 시설을 균등하게 반분하였으며, 기존 사무실과 정문을 하나씩 추가로 만들어 각각 2개로 사무실과 정문을 만들었다. 분리 기준은 새로운 공장사무실과 새 정문을 갖는 쪽이 기존 사명(社名) 전남방직(주)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로 하고, 공장의 1/2과 기존 사무실 건물과 기존 정문을 차지하게 된 곳은 사명을 변경하기로 했다. 결국 김형남 사장 쪽이 기존 사무실과 정문을 갖기로 하고, 새로운 사명을 일신방직(주)으로 하였다. 기존 전남방직(전방)은 신한제분 소유주 김용주-김용성 씨가 사용하게 되었다. 결국 일신방직(주)은 전쟁 중에 불탄 생산시설을 복구한, 전남방직(주)의 실질적인 창업자 김형남 회장의 회사가 된 것이다.

김창호 전무와 김해곤 생산부 차장의 만남

1960년 나는 전남방직(주)에 입사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국립공업연구소 연구원 선발시험에 합격하여 공직생활을 시작한 나는 곧 전남방직(주)으로 자리를 옮긴다. 연구원 생활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전남방직에서 최초로 공채를 실시한다는 소식을 들렸고, 공무원 월급으로는 객지 생활의 생활비조차 대지 못했던 나는 전남방직(주) 공채에 응시해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을 했던 것이다.

당시는 한국전쟁 직후로 공장이 별로 없는 데다가 방직공장은 대기업에 속해 있어서 근무 조건도 좋은 편이었다. 따라서 그 당시 방직공장에 취직하는 일은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만한 일이었다. 그때 광주에서 규모가 가장 큰 공장 역시 전남방직(주)이었는데, 전남방직(주)의 공채 소식을 듣고 지원한 결과 공채 1기로 합격하면서 면방직과 인연을 맺기 시작하였다.

국립공업연구소 연구원에서 전남방직(주)으로 옮기고 보니 월급이 7만2천5백환으로 사택과 식사까지 주니, 1만 환을 받았던 연구원 월급의 10배 이상이었다. 이는 그 당시 섬유산업이 얼마나 호황을 누리고 있었는지, 그리고 방직회사가 왜 모두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는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1961년 전남방직(주)은 다시 전방(주)과 일신방직(주)으로 나뉘었다. 이때 내가 선택한 회사가 일신방직(주)이었다. 일신방직(주)은 김형남 회장이 총사령관을, 그의 아들 김창호 전무가 전장의 대장을 맡는 체제였다. 오너의 아들이지만 공부를 위해 다른 경쟁회사인 동일방직에 입사하여 평사원에서 시작하여 중간 간부가 될 때까지 충실히 근무한 뒤 일신방직(주)으로 자리를 옮긴 김창호 씨는 전무가 되었고, 그 사이 나는 생산부 차장이 되어 ‘드디어’ 만난 것이다. 그리고 우리 둘은 이후 내가 충남방적(주)으로 이직할 때까지 13년이란 시간을 현장과 사무실에서 동고동락하며 정을 쌓았다.

일신방직(주)에서 나는 처음에는 직포 분야의 ‘직기보전작업’을 맡았고, 이어 ‘방적과 소면공정의 보전원’이 되었다. 소면보전원은 청소하기 위해 규정된 주기표에 따라 카드기를 분해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그 작업 중 가장 힘들었던 일은 한 대의 카드기에 있는 212개의 플랫(flat) 볼트(106개×양쪽의 Flat 볼트)를 모두 일일이 손으로 풀고 조이는 일이었다. 육체적인 고단함에도 불구하고 보전작업이 나를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묵묵히 근무했다. 그렇게 5년 동안 공장 내의 각 보전부서를 돌면서 소면공정을 비롯하여 다른 각 공정의 보전작업(기계 maintenance)을 담당했다.

일신방직에서 13년 간 현장 근무 경험은 면방적 기계에 대한 지식은 물론이거니와 현장 일선 직원들의 처지를 헤아릴 수 있는 기술사와 기술경영인으로서의 기본 조건을 갖추게 하는 계기였다. 더욱이 그 현장의 경험은 이후 각종 연구 및 기술개발에 활용될 현장 감각을 익힐 수 있었다.

헤어질 결심, 그리고 김창호 전무의 간곡한 만류

그런데 더 이상 일신방직(주)에 머물 수 없다는 판단을 할 수밖에 없는 일이 발생했다. 직장인으로서는 가장 큰 일일 수 있는 승진 문제가 불거진 것이었다. 13년간을 혼신의 힘을 바쳐 일한 그곳에서 생산부장으로의 승진이 좌절된 것이었다. 직원들조차 당연히 내가 부장이 될 것으로 점쳤던 터였는데, S대를 나온 외부 낙하산 인사가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배신감과 실망감,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쉽게 일신방직에 사표를 던진 것은 아니었다. 청춘을 바친 곳인데 사표를 내는 것이 어찌 쉬울 수 있었겠는가. 몇날 며칠을 고민한 끝에 그럼에도, 나의 자존감을 지키고 한 걸음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일신을 떠나는 것이 맞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김창호 전무와의 인연을 더 끈끈하게 하는 일은 내가 사표를 낸 뒤에 생겼다. 사표를 내고 인수인계를 준비하던 어느 날 김창호 전무가 점심이라도 하자며 나를 불렀다.

별다른 말없이 식사를 마치고 전무실로 자리를 옮긴 김창호 전무가 내 손을 잡으며, “김 차장, 당신은 실력도 있고, 어디든지 갈 수 있겠지만, 13년 동안이나 우리와 함께했으니 앞으로도 회사를 경영해 나가는 데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며 나의 사직을 만류했다. 그런 그의 두 눈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하지만 이미 헤어질 결심을 했던 나는 그의 간곡한 청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애써 헤어짐을 막아보고자 했던 그와, 아쉬움은 있지만 새 출발을 결심한 나는 그날 부둥켜안고 펑펑 울었다.

다 큰 남자 둘이 부둥켜안고 손수건이 흠뻑 젖을 정도로 우는 광경은 어찌 보면 희비극일 수도 있겠지만 섬유산업의 초창기를 함께 헤쳐 온 둘 만의 소회가 그리 깊었던 것은 아닐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본다. 어려움을 함께 헤쳐 온 동지로서의 끈끈한 정, 그리고 헤어져야 한다는 아쉬움과 서운함 등이 복잡하게 얽혀 두 사람 모두 눈물을 제어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말없이 헤어졌다. 그렇게 나의 일신방직 생활은 끝이 났다. 1973년의 일이다.

충남방직으로 옮긴 후에도 한동안 김창호 전무의 러브콜은 계속됐다. 충남방직 천안공장에 근무한 지 3개월쯤 되었을 때 일신방직의 사장을 통해 내가 무난히 정착하여 잘 근무하고 있는지, 일신방직으로 복귀할 의사는 없는지 타진하기도 했다. 전문 경영인 대표이사가 전하는 말은 “지금 회사에 정착이 잘 안 되고 있다면 일신방직으로 되돌아왔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떠나온 사람, 거절밖에 줄 수 있는 답이 없었다.

미국에서의 조우, 그의 진면목을 만나다

이렇게 끊어질 것 같던 김창호 회장과의 인연은 그 후 우연치 않게, 아니 김창호 회장의 인간적인 면모 덕분에 이어졌다.

충남방직(주) 상무이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업무 차 미국 출장을 간 일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김창호 회장을 다시 만난 것이다. 내가 일신방직(주)을 떠난 후 대표이사에 취임해 회사를 경영하던 김 회장이 대표이사 직을 동생에게 물려주고 신병 치료 차 미국에 와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던 내가 그에게 안부를 전하는 전화를 걸었던 것이 계기였다. 나의 전화를 받은 김창호 회장은 내가 묵는 호텔이 어디냐고 묻더니 그 길로 나를 찾아왔다.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차로 상당한 시간 걸리는 길을, 미국 사정과 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나를 배려해 직접 운전을 해 찾아온 것이었다. 그 정성만으로도 이미 감복했던 터였는데, 직접 운전하는 차에 나를 태우고 가면서 김 회장이 초콜릿을 먹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나는 “회장님, 당뇨치료중이신데 초콜렛 드시는 것은 안 좋은 것으로 알고있는데, 그걸 왜 드십니까?” 하고 만류하려 했다. 그랬더니 그가 허허 웃으며 “저혈당 쇼크가 오려고 하는 것 같아. 그래서 응급으로 초콜릿을 먹는 거야” 하는 것이었다. 신병 치료 차 회장직까지 내려놓고 미국에 와 있는 사람이, 경쟁사로 떠난 자신의 옛 직원을 위해 저혈당 쇼크의 위험도 무릅쓰고 그 먼 길을 달려온 것이다. 김창호 회장은 이런 사람이었다. 속 깊은 정이 넘치는 사람, 의리가 있는 사람, 배려가 몸에 배어 있는 김창호 회장한테 나는 다시 한번 감복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러한 생각과 배려는 그의 선친 김형남 회장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본다. 김형남 회장은 늘 입버릇처럼 “사람은 하체가 튼튼해야 상체가 건강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다. 이 말은 회사를 경영하는 데 하체에 해당하는 down stream 업체, 하청업체나 납품업체가 잘 되어야 큰 회사도 견실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늘 down stream 업체,및 하청업체를 돕기 위해 애썼으며, 업체의 어려움을 파악하는 데 소홀하지 않았다.

언젠가 원면 가격이 급상승했는데, 김형남 회장은 원면 가격 상승분에 비례하여 제품 가격을 올려 받으면 의류 제조업체나 닛트 제조업체에 크게 부담이 될 수 있으니, 우리가 힘들더라도 원면 가격 대비 제품가격을 몇 차례로 나누어 올려 받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그야말로 충격 완화 방법을 사용하라는 말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연착륙의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당시 김창호 전무는 이 같은 선친의 뜻을 받들어 down stream 업체나 하청 업체의 어려움을 파악하고, 그들을 구체적이고도 제도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업체를 방문하여 점검하되, 우수 업체에는 인센티브를 주고, 어려운 업체에는 지원 대책을 마련해 주는 일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회사를 떠나 다른 경쟁업체로 이직한 나에게 이런 따뜻한 감정을 보여주었던 것도 김창호 회장의 따뜻한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방직업과 섬유업의 하락에도 불구하고 선친 김형남 회장이 가졌던 이 같은 기업가 정신은 장남 김창호 회장을 거쳐 동생 김영호 회장에게 그리고 김창호 회장의 아들 김정수 사장에게 이어져 오늘날까지 기업의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작년 김창호 회장의 부음을 접하자마자 오래 전 둘이 전무실에서 부둥켜 안고 울었던 일과, 이국땅 모든 것이 낯설던 나에게 혹시라도 두려움이나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까 투병중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보러 왔던 그의 배려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이라 조문도 갈 수 없었지만 오랜 벗이라고도 할 수 있는 존경하는 훌륭한 상사의 부음 앞에서 나는 마음으로 통곡했다. 그리고 “덕망 있고, 후덕한 사람으로서 회사를 잘 운영하던 기업인, 평생 잊을 수 없는 사람”으로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그를 진심을 다해 애도했다.

가정의 달 스승의 날이 있는 달에 애틋한 정이 넘처나는 존경하는 김창호 회장의 생각이 간절하다.

“나의 훌륭한 상사였던 김창호 회장님, 부디 편히 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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