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폐가 있지만 한마디로 우리 섬유산업 전반이 마치 고환을 거세당한 환관처럼 매가리가 없다. 대들보인 화섬산업이 속절없이 붕괴되면서 그 파장이 득달같이 동심원을 그리며 전체 스트림으로 번져 간다.

며칠전 대구시 섬유패션과에 한 섬유기업인이 전화를 걸어 “40년 직물사업 하면서 화섬사 수급불안으로 비상사태를 맞은 것은 처음이다”라고 절규했다. 그 기업인은 “중국 손아귀에 들어간 한국 화섬사 수급의 위험천만한 상황을 알고 있느냐”며 “대구 경북 지자체 세금으로 화섬공장을 가동해 달라”고 애원했다.

TK케미칼과 성안합섬 폴리에스테르사 사업이 요절난 절박한 상황을 하소연한 것이다. 전화를 끊고 난 대구시 당국자는 “오죽 다급하면 이런 어거지 주장을 펴껬느냐”며 “할수만 있다면 그 요구를 들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착잡한 심정을 필자에게 고백했다.

상상만 하지말고 예상했어야

요즘따라 대구지역 언론들도 앞다투어 TK케미칼과 성안합섬이 몰고온 심각한 상황을 대서특필하고 있다. 지난 26일에는 대구의 유력지에서 1면 톱기사로 ‘구미 원사 제조사 잇단 중단... 지역 섬유업계 초비상’ 제하로 대서특필했다. 사태의 한가운데에 있는 지역 섬유단체장이 이를 사진으로 찍어 섬산련 이사진 단체 카톡에 올렸다.

지역 섬유업계를 대표해 동분서주 전력투구 봉사하고 있는 이 단체장은 또 한차례 비분강개했다. 단체 카톡을 읽은 40명 섬산련 이사 중에 댓글로 반응을 보인 사람은 딱 2명에 불과하더라는 것이다. 대한민국 섬유 산지가 줄초상 위기에 직면해 사안의 심각성을 알렸으나 중앙정부나 지방정부는 물론 섬산련 이사들마저 기찻길 개짖는 소리로 취급하더라는 것이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도 위로와 걱정 한마디 없는 무심한 인심이 야속하다고 탄식했다. 적어도 우리나라 섬유패션산업계의 지도자들인 섬산련 이사진이 이럴진대 “섬유를 미운 오리 취급하는 정부 관료나 금융권 인사들이 괄시하는 것을 나무랄수 있겠느냐”고 버럭 화를 냈다.

거두절미하고 필자는 수년전부터 이같은 사태를 예견하고 우리 각 스트림이 “오늘의 사태를 상상만 하지 말고 예견도 하자”고 채근해왔다. 지난해에는 국내 대표적인 화섬메이커인 휴비스가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 일반사 생산에서 사실상 손을 뗄때부터 폴리에스테르사 사업이 화염에 휩싸일 것임을 경고해 온 것이다.

SM그룹 TK케미칼이 중국의 저가공세 앞에 바람보다 먼저 눕기 시작한 심각한 눈덩이 적자 상황을 내시경이 아니라도 뚜렷이 알 수 있었다. 혹시나 반전의 기회가 올까 싶어 섬유회사에 엉뚱한 계열 건설사 시행사업을 병행시켜 몇 년간 흑자구조를 만들며 버티어 왔다. 얼은 발에 오줌누기로 예상보다 오래 버티어 온 것이다. SM 최고 경영진이 백방으로 검토하고 분석해도 통박이 안선다는 결론 끝에 작년말 포기선언한 것이다.

성안합섬 역시 축지법을 쓰지 않는 한 견딜 재간이 만무했다. 온갖 루머가 난무했지만 경리부장 200억 먹튀사건 이후 주채권의 70%를 쥐고 있는 산업은행이 그나마 워크아웃을 통해 생명을 연장해 주었다. 규모경쟁에 품질마저 손색이 없는 싸고 좋은 중국산 폴리에스테르 레귤러사를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그래도 60여년 역사의 가업인 섬유산업 대부(代父)기업을 의식해 법정관리 개시 결정 이후 하반기부터 규모를 줄여 돈 남는 특수사만 생산하겠다는 의욕이 대견하다.

이모양 이꼴은 재벌축성의 바로미터이던 전성기 섬유산업에 땅꺼미가 지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각 스트림이 방심하고 외면한 결과다. 이제와서 죽은 자식 뭐 만지는 식의 원망이나 책임을 따질 계제는 지났다. 20여년 전부터 장기 전략으로 한국 화섬산업을 냄비속 개구리로 만들기 위한 중국의 고도전략에 설마하다 당하고 말았다. 앞으로가 문제다.

중국산 폴리에스테르 필라멘트를 들여오는데는 8%의 기본관세를 물어야 한다. 중국이 아니고서는 공급망이 없는데 비싸도 살 수밖에 없는 외통수에 몰렸다. 모르긴해도 중국내 직물업체가 한국 수출가보다 비싸게 원사를 살리는 만무하다. 해외 시장에서 가격경쟁력이 밀린지 오래인 국산 직물류의 경쟁력이 어떻게 될 것인가는 불을 보듯 뻔하다.

가격이 싸면 양잿물도 마다하지 않은 우리 직물업계 속성이 중국산 화섬사 대량 수요를 자초했고, 그 업보가 일파만파로 퍼지고 있다. 그 결과 화섬 공멸위기는 득달같이 대구와 경기북부 화섬직물·니트직물에 전이될 수밖에 없다. 싫건 좋건 이제부터는 중국산 화섬사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지나친 기우인지 몰라도 향후 전개될 상황이 녹록치가 않다.

가격 구조도 문제지만 우리 직물업계가 지향해야할 화섬직물 차별화가 암초에 걸릴 수밖에 없다. 차별화 기밀이 그대로 중국 직물업계에 넘어가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차별화 원사를 한국 직물업계에 우선 공급해줄리도 없다. 지금도 웬만한 차별화 직물은 중국에서 거침없이 쏟아지고 있다. 한국 직물업계에 독점 공급할 차별화 원사가 얼마나 있을지도 감이 안잡힌다.

국내 화섬산업 기본은 남아 있다

그렇다고 속수무책으로 체념할 수는 없다.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해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다행히 아직은 국내 화섬산업이 전부 고장난건 아니다. 기본은 남아 있다. 차별화 소재로 대거 전환했지만 효성의 연산 12만톤 캐퍼와 대한화섬 6만톤 규모, 도레이첨단소재 9만톤 규모는 가동되고 있다.

우선 각국과의 FTA 협상에서 얀 포워드를 기준한데 따른 원산지 문제도 이들 국내 메이커가 있어 해결이 가능하다. 이들 남아있는 국내 화섬메이커가 공급량을 최대한 늘려야 한다. 적자 보지 않을 수준에서 중국산과의 가격차를 최소화해 국내 직물업계를 지원해야 한다. 제·편직 업계의 국내 수요가 늘어나면 가동률이 올라가고 자동으로 원사 원가가 내려간다.

또 화섬산업이 발달한 대만산 등으로 수입선을 전환하는 방안도 적극 모색해 경쟁시켜야 한다.

무엇보다 중국이 많이 따라왔지만 아직은 국내 메이커가 비교우위를 갖고 있는 특수사 비중을 확대해 차별화 제품으로 발 빠르게 방향을 틀어야 한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제직이건 편직이건 중국과 똑같은 제품으로는 자살행위다.

이 바탕에서 서울 섬산련과 대구·경기 섬유패션 단체가 머리를 맞대고 대응책을 강구해야 한다. 각자도생만 강조하고 강건너 불구경 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심각하다 못해 참담하다.

저작권자 © 국제섬유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