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를 정치의 하부개념으로 보는 것은 쌍팔년식 사고다. 경제가 망가지면 민심은 득달같이 진영논리를 집어 삼킨다. 살기가 팍팍하면 조변석개한 민심은 정권을 겨눈다. 지금은 주홍글씨가 됐지만 문정부 시절 이단 경제 학자의 생체실험인 소득주도성장의 폐해가 경제를 망치고 민심을 이반시켜 정권을 뺐겼다.

윤석열 정부도 상황은 녹록치 않다. 전세계 금융과 실물경제가 동시에 발작을 일으키고 있다. 무역의존도가 80%인 나라에서 수출이 6개월째 감소됐고 무역수지는 13개월째 적자행진이다. 지난해 무역적자가 사상 최고인 473억 달러에 달한데다 올들어 벌써 누적적자가 224억 달러로 커졌다.

섬유수출 비중은 명함도 못 내밀지만 반도체 수출과 증시·부동산시장 부진으로 세수가 대폭 감소돼 나라 살림살이에도 비상이 걸렸다. 한국경제를 유리알처럼 들여다 보고 있는 IMF는 올해 한국 성장률을 1.5%로 가혹하게 낮췄다. 먹고 살기가 팍팍하면 국정운영의 동력인 정권 지지도가 추락하고, 당장 내년 4월 총선에도 빨간불이 켜질 수밖에 없다. 영국 시인 TS엘리엇이 지적한 잔인한 4월이 가기전에 포개진 정치·경제의 참사가 사라지길 고대 해본다.

TK케미칼· 성안합섬 사태 불구경

본질문제로 돌아가 생뚱 맞지만 강태공을 예증해 본다. 겨울철 얼음 낚시를 즐기기 위해 강태공들은 호수 가운데로 집결한다. 강 가운데 얼음두께가 두텁고 고기가 몰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동이 시작되면 강가에서부터 얼음이 녹는다. 강 가운데 있던 태공은 강가 얼음이 녹는줄 의식하지 못하고 안심하다 어느 순간 물속에 빠져들기 십상이다. 우리가 속해있는 섬유패션산업도 강가에서부터 녹아버린 얼음을 인식하지 못하다 덩달아 물속으로 빠져드는 우를 범하고 있다.

90년대말 2000년대초 국내 봉제산업이 난파선에 쥐빠져 나가던 탈출러시를 이룰때 대구나 경기 직물업계는 별 걱정없이 태연자약했다. 국내 봉제산업이 공동화돼도 직물원단은 국내에서 공급할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한 것이다.

하지만 봉제공장이 나가면서 원·부자재까지 현지화란 복병을 만나 시장을 잃고 생사기로에서 표류하고 있다. 최종 다운스트림이 떠나자 직물원단 업계가 직격탄을 맞았고 연쇄적으로 화섬, 면방의 업스트림이 치명타를 맞았다. 설상가상 규모경쟁으로 한국시장을 말려 죽이려는 중국의 마각이 현실로 다가오면서 섬유산업의 대들보인 면방과 화섬산업이 내려앉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폴리에스테르사를 생산하는 섬유재벌들이 속수무책으로 간판 내리고 문닫은 참상을 지금 이순간 눈뜨고 볼 수밖에 없는 기막힌 상황이다.

알다시피 반세기 이전부터 화섬직물 소재인 폴리에스테르사 사업은 이땅에서 재벌축성의 지름길이었다. 코오롱그룹도 모태산업이자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코오롱을 재벌기업으로 키운 폴리에스테르와 나일론 사업을 2019년 포기할 때 섬유업계뿐 아니라 재계가 의문을 제기했다. “성급하고 부박한 결정”이라고 비난받기까지 했다. 하지만 코오롱FM의 포기는 성급함이 아니라 선견지명이었다.

화섬기업들이 줄초상을 겪는 지금의 상황에서 현명한 판단이었다. 고합그룹이었던 KP케미칼이 소리소문없이 폴리에스테르 필라멘트 사업에서 손을 뗄때만 해도 충격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국내 최대 폴리에스테르사 메이커인 SM TK케미칼이 자진 사업을 정리하는 2월말부터 급기야 “올것이 왔구나”하는 허탈한 탄식을 떨칠수 없었다. 바늘로 찔러도 한참 있다 ‘아얏’ 소리하는 대구 화섬직물 산지와 경기 니트직물 산지가 원사수급 불안에 비상이 걸렸다. 예상은 했지만 상상까지는 못했던 중국의 손아귀에 한국 직물업계가 자진해서 들어간 것이다.

사실 TK케미칼은 SM그룹이 재벌랭킹 30위권 그룹에 진입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10여년전 TK케미칼을 인수한 SM건설은 승승장구해 많은 기업을 M&A를 통해 인수했다. 하지만 화섬산업 전성기에 해가 기울자 TK케미칼도 적자수렁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수년간 그룹 건설사 시행 사업으로 수혈해 적자를 보전하며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왔다. 결국 밑빠진 독에 물붓기를 언제까지 지속할지 앞날이 캄캄한 상황에서 폴리에스테르사 사업 포기란 극약처방을 선택했다.

TK케미칼과 함께 레귤러사를 막판까지 유지하던 성안합섬이 급기야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신청하는 충격적인 사태가 발생했다. 예기치 않은 경리부장 200억 횡령사건이 터진후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 관리 워크아웃에 들어간지 2년만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 산은 워크아웃 체제에서 채권은 동결됐지만 운영자금은 자체 해결해온 성안합섬은 중국의 저가 공세 앞에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TK케미칼과 타 화섬메이커처럼 생산하면 할수록 적자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법정관리 신청은 지난 7일이었지만 중합·방사 등 생산라인은 18일부터 24일 사이에 가동을 멈춘다. POY와 필라멘트 등 폴리에스테르 일반사 생산의 쌍두 체제인 TK케미칼과 성안합섬은 코오롱FM과 같이 이부문 사업을 역사속에 묻고 말았다. 70여년 한국 섬유산업사의 핵심인 화섬 폴리에스테르사는 이렇게 종말을 맞았다. 당사자뿐 아니라 ‘주식회사 한국섬유산업’의 조종을 알린 셈이다.

생사기로 미들스트림 운명 가물가물

문제는 국내 화섬 폴리에스테르사 메이커가 사라진 다음 대구와 경기 화섬직물 및 니트직물 산업의 원사수급을 어떻게 해결할지가 관건이다. 물론 이미 국내 폴리에스테르사 수요량 월 4만톤 규모중 국내 메이커 공급은 겨우 1만2000톤에 불과해 나머지는 중국산 수입사로 충당해온 점을 감안하면 당장 원사 파동을 유발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국내 메이커가 존립할때와 소멸된 후의 상황은 예상보다 훨씬 어려워질 개연성을 부정할 수 없다.

약삭 빠른 중국 화섬메이커들이 한국의 화섬메이커 포기상황을 유리알처럼 들여다 보면서도 아직 가격과 납기를 크게 올리거나 지연시키지는 않고 있다. 세계 경기가 엄동설한이고 중국 내수경기도 정상회복까지는 시간이 걸려 당장 한국 시장을 뒤흔들지는 않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화섬사도 염료처럼 중국의 일방통행으로 인한 가격 급등과 납기지연 등의 고통은 시간문제다.

폐일언하고 핵심 원자재인 폴리에스테르사의 수급불안과 가격 급등, 납기지연은 물론 여신불가, 원산지 증명 등 힘들고 어려운 일이 차고 넘친다. 남아있는 국내 화섬직물·니트직물·염색산업·준비공정 등의 생명력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가 발등의 불이다. 고임금·인력난 등의 고비용 저효율 구조에서 전력료 인상 등 비틀고 쥐어짜는 제조업 말살 정책에서 살아남는 자가 승리자다. 이 판국에 섬유산업의 줄파산 비명소리를 못듣는 청맹과니들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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