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曺永一 칼럼] 호미로 못 막지만 삽으로 막자

총알처럼 빠른 세월의 속도에 어느덧 낮과 밤이 같은 춘분(3월 22일)을 맞았다. 봄의 전령이 벌써 안방 문고리까지 다가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엄동설한이다. 가뜩이나 글로벌 경제의 복합위기 속에 금융과 실물경제가 발작을 일으켜 나라 안팎이 뒤숭숭하고 혼란스럽다. 미국의 실리콘밸리은행 파산 이후 세계 금융시장과 선물시장이 폭풍을 맞았다. 돌아가는 통박이 그야말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이 판국에 일본과의 강제징용 해법을 놓고 백기투항·굴욕외교 시비로 진영간에 또다시 윽박지름과 내지름이 난무한다. 요미우리 신문이 무려 9면에 걸쳐 특집을 실어 일본 외교의 승리를 기정사실화해 한국인의 염장을 질렀다.

국내 여론의 질타속에 또다시 흑백논리가 기승을 부려 내편·네편으로 갈리지만 양측 주장 모두 일리가 있다. 국민 정서로 봐서는 명분상 굴욕외교로 볼 수 있으나 외교는 실리가 중요하다.

더구나 북핵 등 다중 위기상황에서 인접국과 안보·경제협력은 필연적인 논리이자 현실적인 대안이다. 흑백의 두가지 색만 보는 흑백논리의 이분법은 안된다. 국민의 평가와 역사의 평가는 다르다.

TSMC와 전성기 대만 섬유산업

본질 문제로 돌아가 삼성전자가 국가 예산의 절반에 가까운 300조원을 들여 용인에 세계 반도체 허브를 조성한다고 발표했다. 삼성의 통큰 결단에 찬사와 갈채를 보낸다. 투자는 삼성이 하지만 정부도 수십조원을 들여 R&D 지원 등 파격 정책을 펼친다고 하니 반도체 왕국이 신기루는 안될것 같다.

정부의 반도체 산업의 선택과 집중에 개평을 달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 반도체 시장규모는 연간 5000억 달러에 달하는 금맥이다. 세계 섬유패션 시장규모는 1조 달러를 넘어섰다. 2026년에는 2조 달러 규모로 급성장할 것으로 세계 전문기관들이 내다보고 있다.

우리나라 섬유패션산업은 정책의 사각지대에서 고비용 저효율 구조로 만신창이가 됐지만 아직도 제조업 수에서 가장 많은 4만5000개에 달하고 고용인원도 유통까지 포함하면 100만명 이상이 종사하고 있는 기간산업이다.

어려울때 정부가 반도체의 10분의 1, 아니 100분의 1이라도 구조고도화를 지원했으면 이모양 이꼴은 안됐을 것이다. 섬유패션은 사양산업이 아닌 인류가 존재하는 한 무궁무진한 첨단생활문화산업이다. 선진국들이 섬유패션을 포기하지 않고 육성시킨 이유다.

프랑스는 세계 럭셔리 브랜드 350개중 170개를 보유하고 있다. 국가 GDP의 3%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섬유패션을 중시한다. 실제 자동차·항공산업보다 비중이 크다. 더구나 경박단소의 산업구조 전환에 따라 산업용 섬유의 영역 또한 무한대다. ‘선무당 사람 잡고 반풍수 집안 망친다’고 맥도 모르는 돌팔이들이 섬유패션을 사양론으로 왜곡해 전파한 것이다.

그동안 국내 업계가 각자도생 시대에 구태의연한 천수답 경영으로 안주하다 벼랑 끝에 몰렸지만 아직도 비상구는 있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비듯 기댈곳이 없어 그렇지 조금만 밀어주면 돌파구는 있다.

정부의 산업정책에서 반도체만 빛이고 섬유는 칠흙으로 봐서는 안된다. 전후방 산업이 고루 발달해 있고 노하우와 코카콜라보다 많은 글로벌 시장을 갖고 있다. 왜 섬유산업에는 획기적인 중흥정책을 외면하는지 당최 알수가 없다.

20년만에 국민 1인당 소득이 역전당한 대만은 섬유산업이 여전히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1987년 공기업으로 설립된 TSMC는 세계 1위 파운드리 기업으로 우뚝 섰다. 삼성보다 매출이 많은 TSMC 같은 고임금 기업이 일취월장하고 있음에도 대만에는 섬유기업이 지금도 투자열기가 고조되고 사람이 몰리고 있다.

단순비교로 대만의 대졸 초임은 한국의 70~80% 수준이다. 더욱 억장이 무너진 것은 대만에도 외국인근로자 비중이 높지만 초임은 1200달러 수준이다. 원화기준 월 150만원 수준임에도 서로 가겠다고 외국인 취업희망자가 장사진을 치고 있다.

한국은 자기가 피땀흘려 돈벌어서 월급 줘본일 없는 정치인들이 외국인 근로자에게까지 최저임금을 적용시켜 월 400만원이 대세다. 이 때문에 불구덩이 속으로 중소기업을 몰아 넣었다. 이런 후안무치 정치인들이야말로 산업계 입장에서 역사의 죄인으로 불러야하며 치도곤을 쳐야 마땅하다.

이제와서 경제를 정치의 하부개념으로 간주하며 군림하고 호령한 몰상식한 정치인과 영혼없이 추종한 행정부 사람들을 나무란들 ‘죽은 자식 뭐만지는 격’이다. 하도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 지청구처럼 내뱉어 본 것이다.

물론 지금 이순간 ‘죽건 살건 알아서 하라’는 정부나 정치인들을 원망하고 탓할 여유가 없다. 어떻게 이 위기를 기회로 재기할 것인가가 발등의 불이다. 옹기짐지고 가다 자갈밭에 굴러버린 처지의 우리 섬유산업의 몰락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상황이다.

우리 섬유산업 내부를 내시경으로 들여다보면 참담함을 넘어 허탈한 탄식을 떨칠 수 없다. 나무는 큰나무 그늘에 작은 나무가 자라지 못하지만 산업은 큰 기업이 버티고 있어야 작은 협력기업이 동반성장할 수 있다.

섬유산업의 큰 집은 당연히 업스트림인 화섬과 면방이다. 특히 대구 화섬직물과 경기 니트직물, 그리고 염색가공이 생성되고 성장한 것은 나일론·폴리에스테르사를 생산하는 화섬산업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들보 화섬산업이 중국의 규모경쟁에 따른 밀어내기 공세에 시난고난 시달리다 결국 아작나는 비운을 맞았다. 남은 화섬업체들이 특수사 일부는 공급망을 유지하지만 일반사는 대부분 중국에 코가 꿰어 끌려다닐 수밖에 없게 됐다.

면방은 이미 오래전부터 엑소더스가 이루어져 과거 전성기 설비의 10분의 1로 줄었다. 해외탈출은 지금도 중남미를 향해 진행형이다.

업스트림이 붕괴되는 것은 남아 있는 미들스트림의 줄초상 전조등이다. 제직·편직·염색·준비공정이 존립해야 산지기능이 가능하고 바이어도 한국산을 찾게 된다. 산지기능이 궤멸되면 해외 바이어가 발길을 돌리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아작나는 섬유산업 비상구는 있다.

지금 이순간 한국 섬유산업은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고 누에처럼 집짓고 끝장낼수는 없다. 그나마 아직은 버틸만한 힘이 비축돼 있어 다행이다. ‘㈜한국섬유산업’이란 거대한 댐에 실구멍이 커지고 있어 호미로는 못막지만 지금 서둘면 삽으로 막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다행히 국내 화섬메이커가 아작이 나고 있지만 원사는 대만과 베트남 등지에서 공급이 가능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중국의 독과점 횡포를 대만·베트남·인도산이 방어할 수 있다.

여기에 국내에서도 경쟁력 있는 DTY와 화섬 리사이클 생산 전문업체가 건재하고 있다. 중국과 인도네시아 직물과는 가격 경쟁이 안되지만 차별화 제품의 틈새 시장은 무궁무진하다. 중국·인도네시아산 레귤러 직물과는 달리 차별화 고가 직물원단은 이태리와 일본을 대체할 수 있는 곳이 한국밖에 없다.

비상 상황일수록 비상대책이 시급하다. 정부도 대통령 주재로 비상경제 민생회의를 14차례나 했다. 섬유패션업계도 업계와 단체, 연구소, 정부가 함께하는 비상대책회의를 자주 열어 비상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가는대로 되는대로 내버려 둘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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