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열린 경제계 인사와의 간담회 때 있었던 헤프닝성 일화다. 시작전 잠깐 티타임에 노 대통령이 가볍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면 경제가 잘 될수 있을까요?”... 한 중소기업인이 대뜸 말했다. “현대자동차가 망해야 대한민국 경제가 삽니다.”

뜬금없는 이 발언에 좌중이 한바탕 웃었다. 그 중소기업인이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현대차가 노조 파업을 막기 위해 매년 임금을 파격적으로 올려 중소기업이 따라가자니 가랑이가 찢어져 쪽박을 찰 수밖에 없습니다”... 언중유골이지만 틀린 말이 아니다. 중소기업 사장 월급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는 현대차 노조가 연중행사로 벌인 파업투쟁이 전 산업으로 전이돼 한국기업의 경쟁력을 망가뜨린 것이다.

일본은 매년 극렬하던 춘투가 사라진지 20년이 지났다. 한국은 춘투는 물론 춘하추동 4계절 시도때도 없이 불법파업으로 경제가 골병이 들었다. 정부와 정치권이 강성 노조앞에 속수무책이다 보니 어느덧 기업할 수 없는 나라, 노동하기 좋은 나라로 바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는 커녕 기업할 수 없는 나라로 전락한 것이다.

얼어 죽은 기업 많았던 모진 한해

지난 15년간 강성노조 천국에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엊그제 화물연대 파업이 16일만에 백기투항했다. 지난 14일로 예고됐던 민주노총 2차 총파업 총력 투쟁대회도 취소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내 임기중 불법파업과는 타협하지 않겠다”는 법과 원칙을 강조하면서 무소불위 강성노조가 움찔하고 있다. 천하무적 민주노총도 법과 원칙의 공권력 앞에 몸을 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 경제와 사회의 가장 큰 병리현상은 끝없는 악행과 폐단을 서슴치 않은 강성노조의 불법 파업이다. 영국병을 치유한 대처처럼 이 구조적인 고질병을 윤 대통령이 치유하면 지지도가 오르는 것은 물론 그것만으로도 역사에 남을 치적이다.

말을 바꿔 한해를 마감하는 세모에 섬유패션업계는 되는 일도 안되는 일도 없는 허탈한 탄식을 떨칠 수 없다. 안보와 경제의 국가적 복합위기상황에서 섬유패션업계는 대부분 모진 고생을 뒤로 하고 새해를 향하고 있다. 섬유산업은 추풍낙엽 처지이고 정부 지원정책이나 단체의 기능과 역할은 헛발질이었다.

뜨뜻미지근한 정부 지원정책이지만 그나마 기대를 걸었던 5900억원 규모의 섬유패션 R&D 자금도 소리만 요란했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다. 지난 2019년에 일몰된 연간 400억원 규모의 정부 스트림간 기술개발사업 후속으로 2024년부터 2030년까지 연간 700억~1000억 규모로 추진될 R&D 지원사업이 2차 본예타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20여년만에 섬유산업연합회가 실시하고 있는 전국 섬유산업 시설 실태조사도 섬유산업의 자동화 개체 지원을 위해 정확한 통계의 전수조사가 급선무이지만 전수가 아닌 일부 시범조사에 그치고 있다. 대구에 1천만원, 경기·부산에 500만원씩 사탕값을 지원해 2000개 기업중 200~300개 기업만 시범조사하면 그 통계의 신빙성을 누가 믿을 수 있을지 걱정이다. 경기 불황과 코로나로 만신창이가 된 섬유산지의 직기 수가 줄고 줄어 원사 팔 시장이 없고 수급전략 마련도 어려운 처지다. 오랜만에 실시한 전국 단위 실태조사의 통계를 기준으로 자동화 설비 개체 또는 신·증설 확충전략을 마련해야 할텐데 반토막도 안되는 부분 조사라니 매가리가 빠진다.

모처럼 1차 예타 통과후 2차 본예타에 대응하는 업계 수뇌들의 대응전략이 “너무 안이했다”는 비판이 나왔지만 이미 기차는 떠난 뒤였다. 2차 본예타 때는 과기부 고위층과 접촉해 당위성과 필요성의 절박성을 설득했어야 했다.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 그대로 태산이 요동치더니 나온 것은 쥐 한 마리이었다.

정부의 무관심, 단체의 무능력 속에 업계의 상황은 더욱 처절하게 망가지는 한 해였다. 우선 섬유수출의 생사여탈권이 걸려있는 미국 시장이 30~40년만에 최악의 불황의 늪을 벗어나지 못해 극소수를 제외한 각 스트림이 불구덩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크고 작은 의류 수출벤더들이 오더 고갈로 대규모 해외 소싱공장까지 축소지향하면서 원사·원단 발주가 반토막났다.

해외 대규모 자가공장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비상이 걸렸고 하청 임가공도 모두 끊었다. 벤더에 공급하는 면방과 원단 밀들 뿐 아니라 편직·염색 관련 회사들이 혹독한 오더 가뭄에 신음했다.

한국에 남아있는 직물·편직·염색 업체들의 떡쌀 담그는 소리가 요란한 것은 물론 대들보 업스트림에도 곡소리가 그치지 않고 있다. 화섬 메이커중 이익내는 회사가 전무한 채 강도 높은 조업단축은 물론 아예 오바올이란 이름으로 셧다운까지 불사했다. 국내 직기 대수가 급속히 줄어 실을 팔 수 있는 시장이 왜소해진데 이어 중국산 수입사의 저가공세는 더욱 기승을 부려 탈진상태다. 과거에는 화섬 메이커가 채산이 맞지 않아도 손해를 감수하고 일반사 생산을 이어갔지만 적자가 눈덩이처럼 쌓이자 손해나는 원사는 아예 생산을 포기했다. 재고는 4만톤에 달하지만 사용할 실이 없다고 화섬직물업계는 아우성이다. DTY 수입사 가격이 Kg당 300원씩 차이가 나자 500톤, 1000톤씩 한꺼번에 사서 재미본 직물업체가 늘어날 정도로 화섬사 시장이 난장판이 됐다.

국산 원사 메이커가 죽고나면 필연적으로 중국산 가격과 납기횡포가 기다리고 있지만 우선 죽는 것보다 앓는 것이 낫다는 전략이다. 애국심도 상도의도 사라진 험악한 분위기다. 그만큼 대구 직물업계나 경기 니트직물업계 상황이 절박한 것이다. 국내 남아있는 미들스트림이 생존에 적색경보가 발령되면서 버팀목 화섬산업이 결딴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억장이 무너지는 것은 이미 해외로 대거 빠져나간 국내 면방업계까지 극한상황에 몰려있다. 재력이 좋은 면방업체까지 제살깎기 출혈경쟁이 도를 넘어 시장이 붕괴되는 상황이다. 하나의 예증으로 현재 국내 면방사가 생산에 투입하는 원면은 파운드당 베이시스를 포함해 1.50달러의 고가면이다. 코마30수 제조원가중 원면값만 700달러다. 반면 현재 판매가는 고리당 580달러 수준이다.

㈜한국섬유산업 궤멸 두고 볼 것인가

10년 불황을 딛고 작년과 금년 상반기까지 호황을 누려 고리당 950달러까지 치솟던 면사값이 580달러로 폭락한 것이다. 한국산보다 고리당 30~50달러가 싼 인도산이 620달러인데 한국산이 580달러이면 고리당 300달러씩 얹혀 파는 격이다. 한국산 면사가 세계에서 가장 싸다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말못할 일부 업체의 사정이 있지만 너죽고 나죽자는 행태다.

섬유산업의 3개 스트림중 다운스트림인 봉제는 이미 공동화(空洞化) 된지 오래이고 미들스트림은 수년전부터 시난고난 떡쌀 담그는 추세다. 그래도 규모와 재력에서 대들보 역할을 하는 업스트림의 화섬산업의 적색경보에 이어 면방까지 극한상황을 치닫고 있다.

지금 업계 스스로 사즉생 각오로 몸부림치고 있지만 상황은 결코 녹록치 않다. 내년이 더욱 춥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업계의 각자도생은 물론 단체, 연구소, 정부가 특단의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주식회사 한국섬유산업’은 소멸에 이어 궤멸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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