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그럴것인가.” 국민들은 은근히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봤다. 지난번 미국에서 지금처럼 쪽팔리는 비속어 파문이 불거질까봐 조마조마 걱정했다. 다행히 같은 돌에 두번 넘어지는 실수는 없었다. 걱정은 기우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동남아 국가연합(아세안) 10개국 정상회담과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무난히 소화하고 귀국했다. 어느덧 훌쩍 커진 대통령과 대한민국을 각인시켰다. 귀국 즉시 사우디 빈 살만 왕세자와 회담도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이 궁을 비우거나 다시 돌아와도 나라안은 폭풍전야의 파열음이 그치지 않는다. 이태원 참사 후유증이 진정은 커녕 민심의 포성(砲聲)이 더욱 커졌다.

대통령 수석이 국민을 대표하는 기관에 출석해 “웃기고 있네” 조소로 응대하고 주무장관은 “폼나게 사표 쓰고 싶다”고 어깃장을 놔 공분을 샀다. 설상가상 화물연대를 비롯 강성 노동계의 극렬한 동투(冬鬪)까지 예고됐다. 여야 정치권은 말로만 국민을 팔고 실제는 물고 뜯는 정쟁에 몰두하고 있다. 세계경제가 발작을 일으키고 안보까지 복합위기다. 죄 없는 국민이 고생이다.

생뚱맞게 들릴지 몰라도 손자병법 계책에 우직지계(迂直之計)라는 말이 있다. 곧장 가는것보다 우회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묘책은 여야 협치다. 국민을 이기는 대통령은 없다.

문희갑 전 시장 따끔한 충고 새겨야

우리 얘기로 돌아가 며칠전 대구 섬유업계 원로 중진들의 월례 모임인 ‘섬우회’가 문희갑 전 대구시장을 초청했다. 벼랑 끝에 몰린 지역 섬유산업을 기사회생시킬 묘책이 무엇인지 조언을 듣기 위해서였다. 필자도 기억하지만 문 전시장은 탁월한 식견과 안목을 지닌 행정가 출신이자 미래를 통찰하는 능력이 뛰어난 거목이다.

그가 대구시장 재임시절인 1999년부터 2003년까지 낙후한 대구 섬유패션 육성방안인 김대중 정부의 밀라노 프로젝트를 성안하고 집행한 장본인이다. 섬유패션산업에 강한 신념을 갖고 국비·지방비·민자를 포함 무려 6800억원을 투입한 단군 이래 최대사업을 진두지휘했다. 대구에 서울에도 없는 거대한 패션센터와 소재개발과 염색 고부가가치를 표방한 섬유개발연구원과 다이텍연구원이 존립한 것 역시 DJ정부 아래의 그의 공적이라 할 수 있다.

거두절미하고 이날 ‘섬우회’ 모임에서 문 전시장은 특유의 달변을 구사하며 업계 대표들을 심하게 추달했다. “밀라노 프로젝트의 근본 목적은 대구가 직물산업으로 안주하기는 어렵다는 판단 아래 패션과 공조해 이태리 밀라노처럼 아시아의 밀라노를 표방한 것”이라고 다시 회고했다. 그 일환으로 여러 인프라와 함께 “대구 봉무동에 어패럴 단지를 만들려는 구상으로 부지까지 확정했으나 시장을 그만두자마자 어패럴 단지가 아파트 단지로 변해 꿈이 무산됐다”고 분개했다. “직물산업에만 의존해서는 대구 섬유산업의 미래가 없다”는 본인의 철학이 수포로 돌아간 후 “대구가 지금과 같은 표류와 방황을 피할 수 없게 됐다”고 질타했다.

80대 중반의 건강한 원로로서 해박한 지식과 소신 강한 달변으로 요즘도 외부 강연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는 문 전시장의 지적과 충고는 논리가 정연했다는 전언이다. 사실 섬유산업이 대구보다 낙후된 부산에는 인디안, 파크랜드 패션그룹형지 같은 기라성 패션기업이 전국에서 두각을 나타내지만 대구에는 이상하게도 이런 패션기업이 없다. 그게 대구 섬유패션산업의 한계다.

2000년대 들어 국내 봉제산업이 엑소더스할 때 대구는 “봉제는 가도 원단소재만 한국에서 공급하면 된다”는 상식도 진실도 통하지 않은 천수답 사고에 젖어 있었다. 분초를 다투는 변곡점시대에 봉제가 가면 소재의 현지화는 필연적인 논리임을 망각한 것이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고객인 봉제산업이 떠난후 국내적으로 고임금 인력난이란 피할 수 없는 고비용 저효율 구조가 급격히 덮치면서 대구 산지가 울타리가 사라진 글로벌 시장에서 고배를 마신 것이다.

본지가 매분기별로 조사발표한 섬유패션 상장기업의 경영실적에서도 의류벤더·패션브랜드는 매년 중단없이 일취월장하지만 직물제조업은 매출·영업이익 모두 바닥밑에서 헤매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 야드당 2센트·3센트를 놓고 원가경쟁을 벌이는 것이 직물산업의 구조다. 반면 패션기업은 제조원가의 5~7배를 판매가에 적용해 큰 실수만 없으면 재고부담을 안고도 남는 장사가 보장된 것이다.

더구나 직물산업이 갈수록 망망대해 편주처럼 생사기로에서 표류하는 사이 앞 공정인 화섬산업까지 극한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규모 경쟁에서 중국과 대만 등지에 계란으로 바위치기인 국내 화섬기업들이 간판 내리고 문닫을 위기까지 몰리고 있다. 해외에 대규모 생산기지를 구축하고 있는 의류벤더와 패션브랜드들이 비싸다는 이유로 국산 소재를 외면하면서 추락의 속도가 더욱 가파른 것이다. 의류벤더나 패션브랜드에 애국심을 호소해 본들 씨알이 안먹힌다.

결론적으로 대구 산지가 사는 방법은 두가지다. 하나는 소재혁명을 일으켜 직물의 특화와 차별화로 제값받는 전략이다. 지금처럼 80년을 울궈먹은 폴리에스테르 위주로는 미래가 없다. 규모 경쟁은 오래전에 탈락했고 대안인 차별화·특화 전략은 소재개발이 안돼 불가능하다. 당장 기업이 죽게 생겨 소재개발 투자가 녹록치 않은 것이다. 연구소·단체·정부가 이 문제해결에 혁명적인 전략을 만들고 추진해야 한다.

또 하나 대구 산지가 수단방법을 동원해 패션을 일으키고 봉제설비를 구축해야 한다. 봉제시장이 없는데 원단을 팔 수 있는 비상구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말로 훈수하는 것과 실제상황은 많은 괴리가 있다. 그렇다고 손놓고 있을수는 없다.

소재혁명· 패션산업육성 없이 불가능

이같은 명제는 설정된지 오래다. 그럼에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겠지’하며 허송했다. 각자도생 시대에 책임은 기업 스스로 져야하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개별 기업의 타개책 미비는 스스로를 옭아매 고사상태로 빠질 수밖에 없다.

또 하나 피하거나 변명할 수 없는 것은 업계의 리더인 섬유패션 단체장의 소극성과 방관자 자세다. 서울·대구·경기·부산에는 단체와 연구소가 60여곳에 이른다. 회장·이사장 직함이 수두룩하다. 그 정점에 서울 섬산련과 4개 권역 섬유패션 연합회가 있다. 이들 단체장들이 수시로 모여 현황을 파악하고 처방을 제시하는데 총력을 경주했어야 했다. 아쉽고 안타깝게도 서울 섬산련 회장과 대구 단체장과의 합동회의가 1년 6개월이 지나도록 한번도 없었다. 경기·부산도 마찬가지다.

섬유산업의 서까래, 기둥은 물론 뿌리채 뽑히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지도자들이 강건너 불구경해서는 안된다. 지도자가 죽어가는 산업을 살리는 만병통치약은 못되어도 현장의 애로사항을 직시하고 처방을 제시했어야 했다.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면 선원들은 파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선장 얼굴을 쳐다본다. 선장의 얼굴에서 극복할 수 있는 자신감이 보이면 파도와 사투를 벌이며 위기를 극복한다. 단체장은 선장이고 함장이다. 외롭고 힘들어도 소명의식을 갖고 봉사하며 전력투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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