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가· 고금리· 고환율 삼각 파도에 경제 전반이 추풍낙엽 위기를 맞았다. 환란 이후 최악의 복합 위기신호가 동시에 몰아치고 있다.

이 와중에 여야 정치권은 정쟁에 매달려 각혈하며 싸우고 있다. 대통령 국정 지지율이 여전히 낯부끄러운 20%대에 머물고 집권여당은 이준석 몰아내기 권력투쟁으로 사생결단하고 있다. 야당은 ‘정적제거 음모’라며 이재명 지키기에 사활을 걸었다. 국민의 입장에서는 시금털털한 꼴불견 모양새다.

27년전 이건희 회장이 일갈한 명언이 자꾸만 되새겨 진다.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 기업경쟁력은 2류...”, 공장 하나 건설하는데 도장 1000개가 필요한 한심한 구태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정치권이 국가와 국민은 뒷전이고 오로지 공천에 눈이 어두워 용비어천가를 부르는 낯부끄러운 행태에 국민 혈압만 올라간다.

성을 쌓는데는 10년이 걸려도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경제가 무너지면 정치도 동반 함몰한다. 아직도 경제를 정치의 하부개념으로 오판하는 사고양태부터 바꿔야 한다. 우리 정치권이 입에 쓰지만 몸에 좋은 선각자 이건희 회장의 고언(苦言)을 곱씹어봐야 한다.

화섬 선진국 日의 쇠퇴 대만의 성장

본질문제로 돌아가 어폐가 있지만 우리 섬유산업의 대들보인 화섬산업의 목숨이 간당간당하다. 대구 화섬직물과 경기 니트직물의 원사공급자인 화섬업계가 백척간두 위기에 몰려있다.

경기 순환적인 일시적 불황이 아니라 구조적인 고립무원 한계상황에서 표류하고 있다. 수요는 줄고 가격경쟁력이 떨어져 재고는 쌓이고 강도 높은 감산에 생산코스트는 더욱 높아지는 악순환이다. 생산하면 할수록 눈덩이 적자를 감당못해 내년에 실시할 오바올을 이달부터 앞당겨 셧다운 상태로 몰아가고 있다.

이것도 ‘얼은 발에 오줌 누기’일뿐 근본 해결이 아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미운 오리가 되면서 가업이자 모태기업을 헌신짝처럼 버린 코오롱FM의 재현은 받아놓은 밥상이다. KP케미칼도 폴리에스테르 필라멘트 생산을 이미 중단했다.

폴리에스테르 필라멘트 부문에서 6대 화섬메이커 생산량이 연산 50만톤도 안돼 겨우 40만톤을 생산하지만 이마저 재고가 월 3000톤씩 늘어난다. SF를 합쳐도 국내 폴리에스테르 생산 캐퍼는 총 100만톤 미만이다.

중국의 생산량이 연산 4000만톤이다. 중국 화섬업체 ‘동혼’의 1개사 생산캐퍼가 800만톤이다. 어느날 이 회사가 재고소진을 위해 창고 하나를 비워 한국에 풀어버리면 한국 화섬메이커는 그길로 졸도 아닌 사망이다. 중언부언하지만 제조원가 경쟁력의 기본은 대량생산이다. 다품종 소량생산은 돈이 안되고 원가만 비싸질 수밖에 없다. 한국 화섬업계의 앞날이 망망대해 편주 신세여서 생존 자체가 가물가물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세계 화섬기술 선진국인 일본 화섬산업의 쇠퇴를 한국이 그대로 답습하는 상황이다. 누가 뭐래도 화섬 선진국은 일본이다. 그토록 쟁쟁하고 승승장구할것 같던 일본 화섬메이커도 지금은 도레이를 제외하고 일본에서 거의 자취를 감췄다. 테이진, 아사히카세이, 유니티카, 구라레 등 기라성 같은 회사가 거의 일본에서 화섬생산을 포기한지 오래다.

레귤러 제품은 승산이 없다싶어 말레이시아·태국·인도네시아로 생산기지를 이전했다. 일본 소요량은 종합상사가 해외공장에서 수입해서 수요자들에 공급하고 있다. 화섬에서 손을 뗀 일본 화섬메이커 대부분 해외이전과 헬스케어, 라이프사이언스(생활과학), 자동차 경량화, IT, 바이오(제약) 쪽으로 전환했다. 유일하게 도레이만 화섬을 유지하며 유니클로와 협력하여 연간 매출 25조중 10조를 섬유가 지키고 있다.

도레이는 후쿠이를 중심으로 클러스터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협력업체만 90개사에 달한다. 이중 유명한 고마찌세렌(고마찌모트리엄으로 개명)이나 마루이직물 등과는 70년을 한결같이 협력업체로 끈끈하게 유지하고 있다.

신소재 원사를 개발해 거래 직물업체에 공급하면 완제품으로 성공할 때까지 무상으로 지원한다. 지정된 거래 직물업체만 원사를 공급해 과당경쟁을 방지한다. 직물업체도 타 회사가 거래하는 곳은 절대 접근하지 않는 불문율을 지키고 있다. 들쥐떼 근성의 한국업계와 근본이 다르다.

일본 화섬업계가 화섬사 생산에서 손을 뗀 가장 큰 이유는 한국과 대만, 중국 때문이다. 신합섬, 신신합섬 등 다양한 신소재를 개발해 상품화하면 가장 먼저 한국에서 카피해 싸게 공급한다. 대만도 마찬가지다.

한국,대만은 약과다. 규모경쟁의 중국은 카피의 귀재들이다. 일본이나 한국, 대만이 만드는 제품 대부분을 중국이 만든다. 그리고 저가로 시장을 석권한다. 일본이 한국에 당했듯이 한국은 중국에 당하고 있는 것이다.

한가지 특징적인 예외는 대만 화섬업계다. 한국과 달리 화섬 경쟁력이 강하다. 인건비가 한국보다 싸지만 시장과 연구 시스템이 강점을 갖고 있다. 대만의 화섬직물과 니트업체 3000개 기업이 중국 본토에 투자했다. 중국에 진출한 대만 직물업체들은 중국산 원사보다 대만산을 선호한다. 면사 고리당 5달러만 싸도 중국과 대만산을 선호하는 한국 벤더업체와는 다르다. 화교의 동질성을 중시하고 있다.

아주 중요한 것은 대만의 섬유연구소의 강점이다. ‘재단법인 대만방직산업종합연구소’는 전문가들이 집결해 한곳에서 시험·분석·연구·개발을 망라한다. 화섬원료에서부터 화섬사, 제·편직물, 염색가공, 봉제 전반의 과정을 한 건물안에서 가장 빨리 정밀분석한다. 세계 패션트렌드 정보를 입수해 이를 곧장 제품화하는데 지원한다. 한국처럼 연구소가 뿔뿔이 헤어져 다른 연구소가 뭘 개발하는지 정보마저 없는 상황과 다르다.

대들보 무너지면 섣가래는 시간문제

나이키, 아디다스, 노스페이스 등 세계 유수 기업의 스포츠·패션 브랜드가 시제품 샘플 개발을 대만에 전부 의뢰하는 이유다. 이를 바탕으로 대만 화섬업계는 한국과 달리 계속 일취월장하고 있다.

아무튼 한국과 일본·대만·중국의 산업환경과 제도, 시스템이 다르지만 한국의 화섬산업은 속절없이 붕괴되고 있다. 한국 섬유산업의 버팀목인 화섬산업이 무너지면 필연적으로 중국의 갑질 앞에 다운스트림이 가격과 납기 모든 면에서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다. 이같은 절박한 상황을 화섬업계 혼자서 극복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국의 섬유제조업의 생명력은 소재개발이다. 소재개발의 주역은 화섬메이커다. 화섬메이커가 생명력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소재개발 안한다”고 몰아세울 수는 없다. 수요업체들이 같이 협력해야 한다. 일본과 대만의 화섬산업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스트림이 공조해야 한다. 산업부나 섬유단체·연구소가 상황을 정확히 직시하고 처방을 마련해야 한다. 한국 섬유산업의 공멸만은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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