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敗塗地

코로나19 와중에 50일 장마로 얼룩진 섬유패션 업계의 올여름 휴가는 한숨과 눈물이 보태진 고통의 시간이다. 대구 산지는 작게는 10일 많게는 한 달간 휴가 아닌 휴업 상태의 여름휴가가 진행 중이다.

지난 2월에 본격 창궐하기 시작한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이 다시 도지면서 단군 이래 처음 겪은 빙하기에 앞뒤가 막막한 실정이다. 하긴 고비용 저효율 구조에서 시난고난한 우리 섬유의류 업계뿐 아니라 기라성 같은 글로벌 기업들도 한심하기는 매한가지다.

소가 밟아도 끄떡없는 글로벌 자동차 업체를 비롯 굴지의 항공기 제조 업체들이 죽을 쑤고 있다. 도요타는 올 상반기 판매량이 전년 대비 21%나 감소했다. 미국 GM 역시 2분기에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무려 51%나 매출이 줄었다. 항공기 제조 업체 보잉은 전년 동기보다 25%나 감소했다. 난공불락 글로벌 간판 기업들도 줄줄이 날개 없는 추락을 겪고 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산업 지형이 바뀐다

그러나 음지가 있으면 양지가 있다. 코로나가 몰고 온 변곡점의 꼭대기에서 폭풍 성장하는 기업도 많다. 삼성전자는 2분기에 8조 1,500조 원의 천문학적 영업이익을 냈다. 3분기에도 실적 호전을 낙관하고 있다. 온라인 공룡 아마존은 올 2분기 사상 최대 실적을 올렸다. 애플, 테슬라 등 IT·전기차 기업들도 덩달아 초고속 날개를 달았다. 물론 섬유 업계도 코로나19 여파로 마스크와 방호복 부문에서 예기치 않은 특수를 누렸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 수준이다.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갈 만고의 진리는 삽질하지 않고 물이 고이길 바랄 수는 없다는 분명한 사실이다. 투자하지 않고 기술 개발 없이 성장 동력을 바라는 것은 요술을 기대한 것이다. 2분기에 8조 1,500억 원의 영업이익을 낸 삼성전자는 이 기간에 반도체에 8조 6,000억 원을 투자했다. 자동차용 배터리 부문 세계 1위 기업으로 깜짝 실적을 거둔 LG 화학도 지난 20년간 적자를 감수하며 배터리 부문에 꾸준히 투자한 덕이다. 일본 도레이 역시 30년 적자를 감수하며 탄소섬유 투자에 올인한 결과 오늘날 세계시장을 석권한 것이다.

반면 투자가 멈춰선지 오래인 국내 섬유 업계는 40년, 50년 된 구닥다리 설비로 지탱하는 회사가 부지기수다. 4차 산업혁명이 본격화된 이 시점에서 스마트 팩터링을 향한 신규 투자와 기술 개발 없이 무임승차하겠다는 것은 하늘만 바라보는 천수답 경영이다. 중언부언하지만 생산 현장에 사람이 없어 서투른 외국인 근로자 의존하면서 중국과 베트남보다 6~10배나 비싼 고임금을 주고 그들과 똑같은 제품으로 경쟁하겠다는 발상이 일패도지(一敗塗地)를 자초했다.

지난 반세기 섬유 산업이 언제라고 평탄한 날은 없었지만 지금이야말로 위기와 기회의 갈림길에 서 있다. 우리가 멈칫하는 사이 경쟁국은 섬유 강국을 향한 기술 패권 경쟁의 트랙을 달리고 있다. 지금이라도 첨단 설비 투자와 차별화 신기술 개발에 전력투구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의 한국 섬유 산업의 진로를 새롭게 설정해야 한다. 지난 2분기만 해도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최대 시장인 미국의 경제 성장률은 마이너스 33%로 추락했다. 하반기 상황도 녹록지가 않다.

니만 마커스, J크루, J·C 페니 등 기라성 같은 미국 유통 공룡 21개사가 상반기에만 코로나 팬데믹에 나가 떨어졌다. 하반기 들어서자마자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와 전통의 상징 로드앤드테일러 백화점이 파산 보호 신청을 했다. 미국 내 유통을 좌지우지하던 오프라인 유통 공룡들이 속수무책으로 떡 쌀을 담그고 있는 것이다.

미국 유통시장에 폭풍우가 휘몰아치면 한국의 의류 벤더나 원단밀들이 편주 신세로 내몰리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해외 진출로 승승장구하던 의류 벤더나 원단밀이 벼랑 끝에 몰리면 득달같이 국내 섬유 산업이 풍전 등하에 몰릴 수밖에 없다. 원자재와 전기료와 함께 제조 원가의 3대 요소인 임금 부담을 감당 못해 심각한 기저 질환을 앓아오던 섬유 산업이 코로나19 공황에 추풍낙엽이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 같은 불안성 가연 심리 속에 더욱 충격적인 것은 섬유 산업의 뿌리이자 대들보가 뿌리째 붕괴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60년간 한국의 섬유 산업을 이끌어 온 코오롱그룹 화섬 사업이 간판을 내려 억장이 무너진데 이어 섬유 산업 뿌리인 면방마저 소멸의 속도가 갈수록 가파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일제하에서 유일하게 민족자본으로 창업됐던 100년 전통 경방은 베트남으로 이전하여 국내 설비가 전무하다. 여기에 호남 경제의 상징이고 또 하나의 섬유 산업 역사인 전방과 일신방 광주 공장이 최근 부동산 개발 회사에 매각되는 비운(?)을 겪었다.

이미 방림방, 대농, 충남방, 대한방을 포함한 대형 면방 업체들이 광활한 공장 부지를 매각해왔지만 전방과 일신방의 매각은 무심이상의 깊은 상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전방과 일신방이 어떤 회사인가. 일제 말 전쟁으로 일본 영토가 폭격이 잦아지자 일제가 일본에 있던 방직공장을 광주로 이설한 곳이다. 대지가 9만 2000여 평의 대규모 공장이며 주일 공사를 역임한 김용주 회장과 통역관 출신 김형남 회장이 해방 후 불하를 받았고 김형남 일신방 회장과 분리시켰다.

회사를 반으로 분할하면서 김용주 회장이 전남방직 상호를 쓰고 구설비를 가진데 이어 신설비는 김형남 회장이 갖고 상호를 일신방으로 신설해 이웃사촌으로 80여 년을 이어왔다. 전방 사주는 조규옥 회장으로 바뀌었지만 일신방과 지금까지 한국의 빈곤퇴치 주역으로 섬유 산업사를 이끌어 왔다. 결국 장강의 뒷물이 앞물을 밀어내듯 국내와 베트남으로 이전하는 시대적 대세에 제물이 되고 말았다. 물론 공장 부지 땅값이 6,850억 원에 달해 재테크는 성공했다.

코로나 빙하기 지금이 투자 · 기술 개발 적기

폐일언하고 고비용 저효율 구조에 매몰된 국내 섬유산업은 이 상태가 지속되면 궤멸 상태를 피할 수 없게 됐다. 이 같은 절박한 상황인데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겠지’하는 안일한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국내 섬유 산업의 현주소다. 기업은 자포자기이고 단체는 무산 안일, 무위도식 상태이며, 정부는 각자도생만을 강요하고 있다. 사방이 지뢰밭이고 해저드로 둘러싸여 앞뒤가 캄캄한 상황이다.

더구나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이전과는 수요와 공급 체계에 대변혁이 불가피하다. 벌써 미래를 내다보는 기업들은 한발 앞서 투자를 늘리고 차별화 신기술 개발에 올인하고 있다. 바로 지금 우리 섬유 업계가 필요한 것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중국과 베트남과 피 터지는 가격 경쟁이 아닌 일본과 이탈리아를 앞선 차별화 제품 개발이다. 이것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투자해야 한다. 일본 경영계의 신인 마쓰시타 전기 창업주 마쓰시타 고노스케 회장의 경영 철학인 “호황은 좋다. 불황은 더욱 좋다.” 불황 때 투자하고 기술 개발해야 호황을 대비할 수 있다는 명언을 경제 빙하기에 다시 한번 되새길 시점이다.

저작권자 © 국제섬유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