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작가 버나드쇼 묘비에는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임종 전에 명문장의 비문을 헌양하겠다고 제안했으나 한사코 거절하고 자신이 이같이 써놓고 눈을 감았다.

모든 제조업이 동병상련을 앓고 있지만 필자는 섬유산업이 우물쭈물하다가 이 모양 이 꼴이 될 것을 오래전부터 경고해 왔다. 장강의 앞물이 뒷물에 밀려나듯 우리 섬유산업이 세계의 공장 중국과 베트남 등 후발국에 밀려 가까운 시일에 화마가 난무하는 극한의 위험지대로 빠질 것을 예고해왔다. 먼저 하늘이 무너져도 살아날 구멍이 있겠지 식으로 천수답 경영에 안주한 업계의 무사안일이 오늘의 참상을 자초한 업보다. 업계의 실상을 제대로 짚어보고 어디로 가야 한다는 나침판이 되어야 할 단체나 연구소가 제구실을 못한 무사안일도 한몫했다.

산업정책을 총괄하는 주무 부처는 백면서생(白面書生)들이 산업의 특성과 이면을 읽어내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다. 섬유산업을 오래 들여다보고 깊이 고민한 내공이 없다 보니 고도의 분석과 판단이 부족해 제대로 된 처방을 낼 수 없었다.

기간산업 섬유 농업처럼 지원해야

중언부언하지만 잘 나가던 섬유산업이 가파르게 하산(下山)을 시작한 지는 강산이 두 번이나 변했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듯’ 핑계와 이유를 코로나19 사태로 뭉뚱그려 얘기하지만 중증 기저질환을 앓은 지 오래됐다. 임금은 중국·베트남에 비해 5~10배나 비싸고 그나마 돈보다 더한 금을 줘도 생산 현장에 사람이 오지 않는 고비용 저효율 구조에서 백약이 무효다. 임금이 비싸고 말도 안 통하고 생산성이 떨어진 외국인 근로자에 의존하면서 중국과 똑같은 제품으로 경쟁하다 보니 계란으로 바위 치기일 수밖에 없다.

급기야 코로나19 사태로 전 세계 수요와 공급망이 모두 망가졌다. 미국과 유럽의 백화점과 체인스토어의 리테일이 모두 폐쇄되면서 생산도 공급도 멈춰 섰다. 신규 오더가 전멸인 것은 물론 이미 발주한 오더까지 무차별 취소당해 한국 내 기업뿐 아니라 해외 진출 기업들도 아비규환 상태다. 한 마디로 국내 섬유산업 전반이 화염에 휩싸여 앞뒤가 막막한 극한 상황에 내몰렸다.

그렇다고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주식회사 한국섬유산업’의 진면목을 내시경으로 들여다보면 아직 절망하며 자포자기할 단계는 아니다. 가격 경쟁력이 문제이지 기술과 디자인, 마케팅, 사후관리 등 순발력에서 전 세계에서 으뜸 수준이다. 새롭게 재정비해 포스트 코로나에 사즉생(死卽生) 각으로 대비하면 희망이 있다.

처방은 먼저 코로나19란 전시 상황을 맞아 정부의 섬유패션 산업에 대한 정책 방향이 혁명적으로 변해야 한다. 섬유산업은 전통산업이자 변함없는 기간산업이다. 크건 작건 4만 8,000개 제조 업체가 있다. 고용 인원도 30만 명에 육박한다. 전체 제조업에서 9%, 고용에서 8% 수준의 막중한 비중이다. 코로나19 전시 상황을 맞아 정부가 기간 산업에 40조원을 투입하기로 한 것은 시의적절하고 타당한 정책이다. 기간산업 중 고용효과가 가장 큰 섬유산업에 가장 많은 비중을 두고 지원해야 한다.

솔직히 포기할 수도 포기해서도 안 되는 것이 섬유산업이다. 노송이 무덤을 지키듯 서민 일자리가 몰려 있는 섬유산업을 더 이상 망가지지 않게 파격적인 지원정책을 펴야 한다. 지금의 상황에서 업계 자력으로는 폭풍 속 편주 신세인 섬유산업의 탈출구가 안 보인다. 단도직입적으로 섬유산업을 지키기 위해 농업 정책과 같은 수준의 지원과 혜택을 주어야 한다.

정부가 농어민에게는 전력료를 파격적으로 인하하고 기름값도 면세 혜택을 준다. 농민들에는 적지 않은 직불금을 보상해준다. 정부가 수매까지 책임진다. 지자체에 따라서는 인건비까지 일부 보장해준다. 지역에 따라 다르겠지만 호남 지역에서는 논이 매물로 나오기 바쁘게 팔리고 있다. 그만큼 농업이 활성화되고 있는 것이다.

의식주의 기본인 섬유 산업을 농업과 같이 정부가 정책적으로 지원 육성해야 할 당위성과 필요성은 차고 넘친다. 우리나라 섬유 기업처럼 내공이 강한 국가는 드물다. 규모 경쟁에서는 중국과 후발국에 비해 대적이 안 되지만 차별화 전략으로 틈새시장을 공략하는데 가장 큰 강점을 갖고 있다. 정부가 전력료만 낮춰져도 상당한 힘을 받을 수 있다. 화섬, 면방 등 장치 산업은 제조원가의 20% 가까이가 전력료다. 중소업종인 가연 업종은 전기료가 제조원가의 40%를 점유한다. 가뜩이나 중국과 규모 경쟁에 밀려 시난고난하는 상황인데 이 판국에 6·7·8 3개월간 전력 피크제가 적용된다. 공장 가동하면 할수록 적자 상황에서 전력 피크제가지 덮쳐 공장을 줄줄이 세울 수밖에 없는 실상을 정부가 제대로 파악하고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 같은 대안이 섬유산업 생존을 위해 필요조건임은 분명하지만 충족조건을 아니란 점을 업계가 알아야 한다. 업계 스스로 구조고도화를 외면하고 감나무 밑에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요술을 바라는 격이다. 설비 자동화로 생산성을 높여 경쟁력을 키우는 것이 선결문제다. 중국이 안 하거나 못하는 제품 개발로 치고 빠져야 한다.

업계의 자구 노력과 함께 단체나 연구소가 제구실을 해야 한다. 업종별 단체가 세계 각국의 섬유산업 기술 동향과 시장 흐름을 파악하고 미래를 향한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부터 제대로 수행해야 한다. 그 바탕에서 업계의 구심적 역할을 해야 하고 그 전면에 단체장이 앞장서야 한다. 하나의 예증으로 참으로 답답하고 한심한 것이 대구 산지다.

롱패딩 이어 방호복까지 중국에 뺏겨

2년 전 롱패딩 열풍을 타고 수천만 야드의 롱패딩 원단을 90% 중국산에 뺏겼다. 당시 필자가 개별 기업으로는 불가능하지만 단체가 구심점이 돼 여러 업체를 묶어 공동 생산 시스템을 갖추면 대량 생산의 이점을 살려 원가를 낮출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대구 단체장들이 대구시장과 경북도지사를 채근해 함께 패션 업체 오너를 만나 “중국과 같은 가격에 맞출 테니 국산 원단을 사용해 달라”고 호소하면 길은 있다고 제안했지만 대구 단체장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코로나19 사태로 세계 1등 방역국의 국격이 높아져 ‘메이드 인 코리아’ 방호복 오더가 넘치지만 그 원단은 거의 중국산이 싹쓸이하고 있다. 대구 산지 직기 80%가 세워져 있는 참담한 상황에서 공동 생산·판매 전략이 없어 알맹이는 중국에 뺏기고 우리는 쭉정이만 줍고 있다. 무능한 단체와 단체장부터 코로나 전시 상황을 거치면서 환골탈태해야 한다.

이 같은 단체의 적극적인 구심점 역할과 함께 성기학 섬산련 회장이 팔소매를 걷어 올린 국방 섬유 국산화만 실현되면 파급 효과가 지대할 것으로 보여진다. 포스트 코로나19에 대비해 업계와 정부 단체가 분연히 일어서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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