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의류 수출 시장에 희한한 장르가 등장하고 있다. 미국의 리테일 바이어들이 한국 벤더들을 ‘봉’으로 취급하고 온갖 갑질을 서슴지 않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를 핑계로 정상적으로 계약한 오더를 무자비하게 캔슬한 것도 모자라 가격을 후려치고 결제를 150데이까지 지연시키는 온갖 횡포가 만연되고 있다. 생산중인 제품을 캔슬하는 것은 물론 이미 선적한 제품도 대금 지불을 거절하기 일쑤다. 미국 백화점 체인과 패션 브랜드 리테일러들이 상식도 진실도 외면한 고약한 짓거리를 눈도 깜짝 않고 자행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지난 3월부터 3개월 동안 오프라인 매장을 봉쇄한 이들 백화점 체인과 패션브랜드들이 6월부터 문을 연다는 소식이 반갑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한숨을 넘어 비분강개를 자아낸다. 3월부터 5월까지 계약한 물량에 대한 제대로 된 배상 없이 폴(fall) 아이템 오더부터 시작하는 얌체 상혼이다.

무차별 오더 캔슬 돈 떼먹는 ‘갑’질

바이어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악덕 바이어에 따라서는 상반기 계약 물량을 일부 인수받는 조건으로 가격을 50% 후려친다. 그나마 대금 지불은 내년에 결제하겠다는 식이다. 3개월 동안 문을 닫아 손해가 크니 고통 분담 차원에서 10% 내외 가격 조정은 이해할 수 있고 우리 벤더들도 대부분 수용할 태세다. 그럼에도 정상적인 계약에 의해 생산 공급한 제품을 이런 식으로 “털도 안 뽑고 그냥 먹겠다”는 심보다. 미국의 유통 대기업들이 겉만 번지르할 뿐 내용은 쭉정이에 불과한 사실이 이번 코로나 사태로 들통났다. 명색이 미국 유통 시장을 좌우하는 대형 백화점 체인과 패션 브랜드들이 불과 6~7개월도 버티기 어려울 정도로 속 빈 강정이었다. 월마트, 타겟 등 극소수를 제외하고 기라성 같은 패션 리테일러들이 순전히 제 돈 안 들이고 남의 돈으로 장사해 떵떵거리며 살아가고 있는 꼴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죽음의 계곡에서 아비규환 상태인데도 서둘러 오프라인 매장을 재개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더 이상 매장을 열지 않으면 백화점과 체인스토아들이 줄초상을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19 이전부터 경영 상태가 나쁘다는 소문은 돌았지만 기라성 같은 유통 재벌들이 법정관리와 외부 자금을 긴급 수혈해 버티기 직전으로 나서고 있다. 113년 역사의 대형 백화점 체인인 니먼 마커스가 법정관리 신청 임박설이 나돈지 오래다. 미국 최대 백화점 체인인 메이시스가 코로나19 사태로 창사 이래 최대 위기를 겪으면서 거래선인 의류 벤더에 대한 갑질로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메이시스에 의류를 공급하고 부지하세월 돈을 못 받고 가격 후려치기를 당한 한국 벤더가 법정소송을 준비할 정도다.

과거 한국 의류 수출에 크게 기여했던 J·C페니 역시 최근 외부 자금 수혈로 위기를 넘겼다고 하지만 앞날은 시계 제로다. 천하의 대형 의류 브랜드인 ‘갭’도 지난 3개월간 매장 문을 닫으면서 자그마치 10억 달러 규모의 순손실을 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미국의 패션 유통 공룡 중에는 작년 9월 말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한국 벤더들과 거래선들에 1,000억 원 이상의 피해를 안긴 ‘포에버21’과 비슷한 수법을 쓰고 있다. ‘포에버21’ 오너인 장도원 씨 부부는 ‘아메리칸 드림’이란 갈채 속에 순전히 남의 돈으로 장사해 알맹이를 챙기고 손을 털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의류 벤더들로부터 외상으로 공급받은 제품을 팔고 난 다음 4~6개월 만에 결제한 것 자체가 남의 돈으로 장사한 땅 짚고 헤엄치기 수법이었다.

이 와중에 주목을 끈 것은 코로나19 사태로 업체당 최소 수백만 달러에서 수천만 달러, 피해를 입은 한국 벤더들이 멀쩡한 사실이다. ‘포에버21’로부터 수십억, 수백억 원씩 손실을 입었고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거액의 자금이 물리고 손실을 본 한국 벤더와 원단밀들이 아직 한 곳도 쓰러진 곳이 없는 것이다. 물론 속으로 골병이 들었겠지만 끄떡없이 버티고 있는 내공이 대단하다. 해외에 매머드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의류 벤더나 원단밀 등이 진짜 장하고 자랑스럽다. 이번 고비만 넘기면 한국 벤더와 원단밀 등은 재도약의 깃발을 높이 들 것으로 기대된다.

역설적으로 코로나19 사태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업종이 섬유의류 산업이지만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키는 산업도 섬유의류 산업일 수 있다. 세계에서 코로나19 역병을 가장 모범적으로 극복하고 있는 방역 선진국 대한민국의 위상은 시장 반응과 직결되고 있다. 전반적으로 섬유의류 피해가 극심하지만 한켠에서는 예기치 않은 새로운 시장이 광범위하게 열리고 있다. 마스크로 시작된 신시장은 메디칼용 방호복 시장으로 광범위하게 수직 상승하고 있다.

내수용 마스크 시장은 한계에 와 있지만 수출 시장에서의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 제품은 줄을 서며 선호하고 있다. 해외에 대규모 봉제 소싱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크고 작은 의류 벤더들은 작게는 수천만 장에서 많게는 2~3억 장 마스크 오더를 소화하느라 표정 관리하고 있다. 마스크에 이은 또 하나의 특수 시장이 바로 무한한 잠재력의 의료용 방호복 시장이다. 중견 의류 벤더인 국동이 미국 정부로부터 1,100만 피스의 방호복 오더를 수주하고 7월까지 선적하게 된다. 국동뿐 아니라 중·대형 의류 벤더들이 오더 단위당 수백만, 수천만 피스 방호복 오더를 받았거나 추진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마스크이건 방호복이건 ‘메이드 인 코리아’만 찾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도 찾아볼 수 없는 투명하고 신속한 방역 체계와 사재기 없는 선진 시민의식에 전 세계인들의 대접이 달라진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고통스럽게 경련을 일으킨 손실도 크지만 반대급부로 새롭게 찾은 이득 또한 차고 넘친다.

‘위기를 기회로’ 코로나로 얻은 것

그럼에도 아쉽고 안타까운 것은 그 많은 방호복 오더가 넘쳐난데 비해 국내에서 원단 조달 능력이 한계에 부딪혀 중국과 베트남 좋은 일 시키고 있는 사실이다. 1,000만 피스의 방호복을 만들기 위해 최소 3,000만 야드 이상의 코팅 원단이 필요하지만 이를 소화할 공장이 국내에 없다. 그동안 국내 섬유생산 기반의 생태계가 붕괴되면서 공급 능력이 사라진 것이다. 하는 수 없이 해외 공장 봉제는 물론 중국, 베트남산 원단으로 조달할 수밖에 없어 빛과 그림자의 아쉬움을 떨칠 수 없다.

어찌 됐건 이제 코로나19 이후를 대비해야 한다. 미국 유통 매장이 6월이면 일제히 재개된다. 죽음의 계곡에서나마 시장은 점진적으로 열리게 돼 있다. 또 미국의 유통바이어들도 한국 벤더의 협력 없이는 재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벤더들과 원단밀의 슬기로운 대처를 기대한다.

더불어 국내 섬유산업도 달라져야 한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겠지’하는 천수답 경영에서 탈피해야 한다. 차제에 도태될 기업은 죽고 살 수 있는 기업만 살려야 한다는 냉엄한 시장 원리를 직시해야 한다. 모두를 다 안고 갈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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