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는 순번이 없다. 익은 감도 떨어지고 땡감도 떨어진다. 전 세계를 죽음의 공포로 몰아가는 코로나19 역병(疫病)이 이같은 섭리를 웅변으로 증명하고 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지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감염시킨다. 흙수저·금수저 구분 없이 동시에 무차별 황천길을 재촉한다. 양의 동서를 불문하고 인류를 대거 몰사시킨 14세기 흑사병과 1세기 전 스페인 독감에 이은 대재앙이다.

천수를 누리며 21세기를 몽땅 살아온 인사도 경험하지 못한 공포의 돌림병이다. 일제 식민지 시대를 겪었던 고령 노인들도 동족상잔의 6.25 사변 이후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다고 실토한다.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 돌연변이 바이러스 앞에 첨단 의학마저 한없이 무기력하다. 잔인하고 저주스런 이 바이러스가 얼마나 더 많은 희생자를 제물로 삼을지 당최 알 수가 없다.

감원하는 기업 유지하는 기업

영국 시인 TS엘리엇은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다. 집단 감염을 방지하기 위한 사회적 거리 두기의 잔인한 계절에 하필 총선이 겹쳤다. 길게 늘어설 투표소 앞에 진정되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다시 창궐할까 겁난다. 이 와중에 투표하겠다는 유권자가 20대 총선 때보다 훨씬 많다고 하니 용감하고 존경스럽다. 죽음의 공포를 아랑곳하지 않고 지지한 후보가 선량이 된 후 20대 국회처럼 개처럼 싸울까 봐 걱정이다.

돌아가는 통박을 보면 내 편, 네 편으로 갈린 진영 논리로 21대 국회가 평탄할 것 같지 않다. 닥치고 정권을 잡기 위해 입에 도끼를 물고 지록위마(指鹿爲馬)도 불사할 태세다. 여야 거대 양당의 두 원리주의자들이 도사리고 있는 한 욕설과 고성, 삿대질이 난무하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원리주의는 상대의 비판이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중심적으로 독선과 아집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본질 문제로 돌아가 전 세계를 죽음의 공포로 몰고 가는 코로나19 사태로 세계 경제가 전대미문의 발작을 일으켰다. 우리 경제 역시 1분기 마이너스 성장이었지만 이것은 예고편에 불과하다. 혹독하게 추락한 내수 패션 경기는 4월에 더욱 엄동설한이다. 국내 백화점이 입에 거품을 물고 파격 세일을 하지만 가뭄에 콩 나기 고객 발길에 땅 꺼지는 한숨이다.

더욱 고통스럽게 경련을 일으킨 것은 섬유의류 수출이다. 쪼그라들 대로 오그라진 국내 섬유산업은 지난 3월이 옛날이다. 대구와 경기섬유 업계는 3월까지 생산 라인에 물린 오더를 처리하기 위해 억지 단축 가동을 유지했으나 4월에는 아예 이삭마저 끊꼈다. 대구경북 섬유산지는 이번 주 들어 거의 공장을 세웠다. 다행히 정부가 수출 기업을 살리기 위해 무역금융을 사상 최대인 36조원으로 늘린 덕에 생명줄은 연장하게 됐다. 또 고용노동부가 아쉬운 대로 고용유지비를 지원해 직원들을 길거리로 내몰지는 않게 됐다.

폭풍 속 편주(片舟) 신세가 된 의류 수출 벤더의 극한 상황 또한 심상치 않다. 해외에 대규모 소싱 공장을 가동하며 승승장구하던 의류 벤더들이 앞뒤가 막막한 상황이다. 규모가 큰 만큼 데미지가 큰 것이 의류 벤더들이다. 연간 1~2조 매출을 자랑하는 대형 벤더나 수천억 매출의 중견 벤더들은 당장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가닥이 안 잡힌다. 주 거래선인 미국과 유럽 바이어들의 매장 셧다운과 무자비한 오더 취소로 벼랑 끝에 몰렸다.

애당초 금년 오더가 넘춰 즐거운 비명을 질렀지만 적어도 상반기 생산 선적 오더는 모두 취소됐다. 심지어 완제품도 선적 직전 취소됐고 이미 선적한 제품도 돈을 못 받고 있다.

수천수만 명에 달하는 해외 공장 근로자에게 무노동 무임금 적용도 녹록지 않다. 공장 가동 중단 사유가 사용자와 근로자 어느 쪽 귀책도 아니지만 노조 입장에서는 무노동 무임금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다소 방만하던 한국 본사 직원 구조 조정을 둘러싸고 벌써부터 부작용과 잡음이 불거진 것도 예사롭지 않다.

고용동결이나 감원을 통해 생존을 모색하는 데 대한 적지 않은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중견 벤더인 풍인무역이 가장 먼저 임금 삭감과 직원 감원 방침에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청와대에 비난의 청원이 1만 건을 넘어섰다. 풍인무역을 시발로 신성통상, 최신물산, 유베이스, 노브랜드, 리무역, GG, 태평양 등 중견 의류 벤더들이 경쟁적으로 임금삭감, 구조 조정 방침을 내놓았다. 기업마다 상반기에만 수천만 달러씩 오더가 취소돼 이에 따른 자금 부담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다.

특기할 것은 중견 벤더들의 이같은 감원 선동과 임금 칼질과 달리 간판급 대형 벤더들은 “구조 조정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해 극명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세계 최대 아웃도어 메이커인 영원무역은 성기학 회장이 “어려울 때일수록 같이 가야 한다”며 국내 본사 전 직원에 대해 털끝만큼도 피해를 주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세아상역의 김웅기 회장도 코로나19 사태로 입은 피해가 천문학적인 수준이지만 “절대 임직원 구조조정은 없으니 안심하고 일하라”고 방침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빅3’인 한세실업과 한솔섬유는 코로나19로 인한 눈덩이 피해를 호소하면서도 아직 인력 감축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있는 것도 영원무역, 세아상역의 대응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

코로나19 사태로 기업 경영에 토사곽란을 앓고 있는 해외 진출 원단밀 중에도 국내 본사 임직원과 해외 주재 직원을 희생시키지 않겠다는 모범 기업도 눈에 띈다. 베트남에 세계 최대 니트 원단 버티컬 시스템을 가동하고 있는 정우섬유·정우비나의 오병철 회장 역시 오더 캔슬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지만 “이 상태가 설사 가을까지 가더라고 한 사람도 감원하거나 임금 삭감 없다”고 공식 발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이 임금 삭감과 감원을 통해 생존을 모색하는 기업과 어려울수록 직원을 보듬고 가겠다는 극명한 대조는 상황이 그만큼 엄혹하기 때문이다. 현금 1,000억원을 쥐고 있는 의류 벤더도 5개월 이상 못 버틴다는 소문이 돌고 있을 정도다. 다만 현금을 누가 더 많이 확보하고 있느냐에 따라 강도 높은 구조조정과 현상 유지가 갈라지고 있다.

분명한 것은 극한 위기 상황에서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임을 부인할 수 없다. 기업이 죽는 것보다는 앓는 것이 훨씬 나은 전략이다. 정부도 기업을 살리기 위해 다각적이고 적극적인 지원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셧다운 된 미국의 유통 매장도 5월 중순부터 서서히 문을 열 계획이다. 동이 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 코로나19 이후를 내다보는 지혜와 준비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저작권자 © 국제섬유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