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한없는 자책과 회한을 안고 영면하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필자와도 각별한 인연이 있던 분이다. 한성실업이란 와이셔츠 전문 수출 회사를 거쳐 지난 67년 자본금 500만 원으로 시작해 재계 랭킹 2위로 끌어올린 그의 불세출의 승부사 기질은 처음부터 범상치 않았다.

의류 수출로 시작한 대우 실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섬유쿼터에 일찌감치 눈을 뜬 선견지명이 있었다. 2005년 말 섬유쿼터제가 폐지되기 전까지 세계 섬유의류 시장은 섬유 쿼터를 가진 기업이 시장을 주도했다.

미국과 유럽의 ‘방대한 섬유 의류 시장은 70년대부터 2005년까지 바이어스마켓이 아닌 철저한 셀러스마켓이 지배했다. 미국과 유럽의 크고 작은 유통바이어들은 쿼터를 많이 가진 기업에 머리를 조아리며 통사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바이어들이 수입물량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쿼터 보유업체와 손잡는 방법이었다. 이를 간파한 김우중 회장은 부적절한 표현이지만,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쿼터 확보에 총력전을 경주했다.

세계 경영의 신화 김우중 회장을 기리며

그 결과 당시 삼도물산, 협진양행, 쌍미실업, 한창 같은 기라성 같은 선발기업을 제치고 국내 1위 섬유쿼터 과점 업체가 됐다. 정부의 섬유쿼터 운용 능력은 기본 쿼터와 개방 쿼터로 분류하면서 개방쿼터 수배 조건인 고단가 비쿼터 시설 합리화 실적 등을 기초로 배정한 데 따라 대우가 가장 기민하게 대응한 결과다.

한마디로 대우 그룹이 최단 시일에 자동차·조선·전자 등 다각 경영의 그룹을 형성해 급부상한 비결은 섬유쿼터가 일등 공신이었다. 김 회장은 90년대 중반 중견 언론인 모임인 관훈클럽 초청 연설에서 대우의 재벌 축성 비결을 묻는 한 언론인의 질문을 받고 “섬유쿼터로 1년에 1,000억 원씩 벌었다”고 실토했다. 80년~90년대 1,000억 원이면 지금의 조 단위 금액이다. 쿼터 차지로 벌어들인 돈으로 재벌 축성을 한 것이다. 섬유쿼터가 부익부 빈익빈으로 굳어지면서 이에 따른 부작용도 컸다. 비싼 쿼터 대행료를 받고 수출을 대행하면서 차지는 차지대로 받고 고단가 L/C와 실적 등을 창구 회사가 독식해 원성과 비판이 잦을 때다. 필자가 일간 경제 언론사에서 섬유 업계를 담당할 때에 이에 따른 문제점과 비판 기사를 가장 많이 썼다. 한국 언론계에서 난해한 섬유쿼터 문제를 가장 깊이 꿰뚫고 쾌도난마식 직필 정론을 전개한 기자가 필자였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김우중 회장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고 이것이 인연이 돼 대우그룹 회장실에도 초청돼 많은 얘기를 나누며 소통을 이어갔다.

중언부언하지만 김 회장은 섬유 수출을 시발로 재벌을 축성한 총수답게 우리나라 섬유산업 발전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메리야스수출조합이사장을 맡아 한미 섬유쿼터 협상을 민간 차원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지원해 한국의 대미수출 쿼터 확보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서울 강남의 금싸라기 땅에 세워진 섬유 센터가 건립된 것도 그가 거액을 쾌척하면서 업계의 동참을 진두지휘하면서 성사됐다. 그가 아니었다면 섬유센터 건립이 과연 가능했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한국섬유산업연합회장으로서 섬유산업 중장기 발전의 초석을 세운 사람도 김우중 회장이었다.

김 회장은 섬유산업을 시작으로 중화학에 이르기까지 한강의 기적을 이룬 국가 경제 발전의 일등 공신이지만 대우그룹이 해체되면서 공적자금 17조 원이 들어간 업보로 하루아침에 중죄인이 된 영욕의 세월을 보냈다. 그나마 주인이 바뀌었지만 김 회장이 애착을 갖고 키워왔던 신성통상과 세계물산이 승승장구하는 것은 위로가 되고 있다.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한 한국 경제에 세계가 얼마나 넓고 할 일이 많은지 깨우쳐준 세계경영의 선구자 김우중 회장의 명복을 빈다.

말을 바꿔 며칠 전 경기도 포천에서 편직공장을 운영하는 어는 기업인과 식사할 기회가 있었다. 이례적으로 “요즘 상황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다음과 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지난주 통계청 직원이 실태조사차 자신의 회사를 찾아와 종업원이 몇 명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흔히 하는 말로 “우리 회사는 영세해 직원 수가 18명에 불과하다”고 답변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통계청 직원이 놀란 기색으로 “그렇다면 대기업이군요”하고 의외의 반응을 보이더란 것이다. 이 통계청 직원이 5년 주기로 산업 현장에 실태조사를 하고 있는 데 요즘 포천 지역 내 극소수 업체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종업원 10명 미만에 심지어 부부가 공장을 돌리는 곳이 많고 아예 설비를 세워놓는 곳이 부지기수”라고 밝혔다는 것이다. 이것이 양·포·동(양주·포천·동두천)이 서 있는 참담한 현주소다. 경기북부환편조합을 이끌고 있는 김병균 이사장(SK니트)도 지역 내 평균 가동률이 50% 내외에 머물고 있다.”고 상황의 심각성을 털어놨다.

양포동뿐 아니라 대구 섬유산지도 비슷한 사정은 마찬가지다. 오더 자체가 극심한 가뭄이지만 받아본들 채산이 맞지 않아 “돌릴 수도 세울 수도 없다.”고 깊은 시름을 토로한다. 아직은 그동안 벌어놓은 돈으로 시난고난 버티지만 내년부터 예상보다 심각한 줄초상이 창궐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공장을 팔려고 애를 쓰지만 매물이 워낙 많아 임자 찾기가 녹록지 않다는 것이다. 앞뒤 막막한 이 판국에 섬유 기업인들에게 이 위기를 기회로 정면 돌파할 기업가 정신을 주문하는 것은 염장 지르는 말로 들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서 주저앉으면 많은 기업이 떡 쌈 담그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쉽지는 않지만 사즉생(死卽生) 각오로 정면 돌파하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 수십 년 이어온 천수답 경영에서 과감히 탈피해야 한다. 핑계 없는 주검 없다고 최저임금 타령으로 날밤을 새우는 것도 비겁한 소치다. 인건비를 줄이고 생산성을 높이면서 품질 경쟁으로 승부하기 위해 자동화 설비투자에 최우선 역점을 둬야 한다. 신기술 개발과 신시장 개척을 위해 결사적으로 덤벼야 한다.

일본 경영계의 神 마쓰시타 회장의 전략

일본 경영계의 신(神)으로 불리던 마쓰시타 고노스케 회장은 아흔네 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산하 570개 기업에 종업원 13만 명을 거느린 대기업 총수이자 경영의 천재였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호황은 좋다. 불황은 더욱 좋다.”는 경영비결을 강조했다. 바로 불황 때 첨단설비 투자와 기술 개발에 투자해 호황이 오면 과실을 챙긴다는 유명한 일화다.

지난 60년간 섬유 산업사를 회고해보면 언제라고 편할 때가 없었다. 중국이란 거대 공룡이 등장하면서 위기는 더욱 고조됐다. 그러나 몸체 큰 짐승은 움직임이 꿈틀할 수밖에 없다. 중국이 하지 못한 차별화와 디자인력, 숏 딜리버리의 강점을 최대한 활용하면 승산은 있다. 더 이상 겁먹고 자포자기는 안 된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는 데는 도전과 민첩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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