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는 정치와 다르다. 이념과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22년 전 이맘때 국가 경제를 거덜 낸 YS 정권 때다. “우리 경제의 펀더멘탈은 건실하다.” 청와대가 어려운 용어를 써가며 뻥을 친지 불과 몇 달 만에 IMF 외환위기가 터졌다.
며칠 전 청와대 핵심 관계자가 우리 경제 상황과 관련, “거시경제에서 굉장히 탄탄한 상황으로 가고 있다”고 자화자찬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우리 경제 자신감 가져도 좋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하지만 경제는 숫자가 말한다. 내수는 폭망상태고 버팀목인 수출도 4월 이상 마이너스 성장이다.
실제 1분기 경제성장률이 10년 만에 처음 마이너스 0.3%를 기록했다. 4월 고용동향도 19년 만에 최악인 4.4%에 달해 ‘실업民國’이란 신조어가 생겼다. 제조업이 거덜 나다보니 전국 산업단지는 잡초가 무성하고 실업급여 창구는 북새통을 이룬다. 중소기업·자영업자, 저잣거리 마실 나온 사람까지 “못 살겠다”고 아우성이다. 어폐가 있지만 실물경제를 모르는 운동권과 시민운동가 출신들이 대통령을 속이고 시장과 동떨어진 허풍을 떨고 있다. 입은 틀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 한다.

 

섬유산업 희망의 싹이 틀 수 있을까

말을 바꿔 공멸 위기에 처한 한국 섬유산업에 치유와 희망의 싹이 틀 수 있을까? 백방으로 생각해도 싹수가 노랗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섬유산업이 재도약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설사 가능하다고 해도 마치 트로이전쟁이 끝난 뒤 귀국하는 고대 그리스 영웅 오디세우스의 여정처럼 길고 험난한 길이다.
어찌 됐건 지금은 범용품으로는 생존이 어려운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다. 사람은 오지 않고 임금은 높고 기업경영전략을 쌍팔년도 천수답 경영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난파선에 쥐 빠져 나가듯 5800개 섬유기업이 해외로 탈출해 94억 달러 이상을 투자했는데도 아직 진행형이다. 산업이 빈사상태에 몰리기 전에 정부가 처방과 지원정책을 강화해야 함에도 각자도생 논리다.
‘나가야 산다’는 현실론을 앞세워 너도나도 엑소더스지만 이마저 갈수록 녹록지 않다. 기업마다 대박 꿈을 안고 해외투자에 나서지만 맞닥뜨린 상황이 기대에 훨씬 못 미친다. 국내 사업 환경이 담벼락이 갈라진 처지에서 벽지만 새로 해서는 소용없음을 직시하고 먼저 나간 기업은 성공확률이 높았다. 버티고 또 버티면서 국내 사업을 고집하다 인력난·고임금과 함께 “오더 주겠다”는 바이어 압력에 못 이겨 수많은 기업이 뒤늦게 나갔다.
인허가 과정의 고초를 딛고 각기 힘에 부친 거액을 투자하며 신설비로 무장해 공장을 가동했지만 예기치 않은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 기술을 그대로 접목해 신설비로 생산한 양질의 제품 가격을 중국 가격밖에 쳐주지 않고 있다. 해외투자하면 주체 못 할 오더 폭탄을 줄 것 같던 바이어 유혹은 허당이었다. 베트남에서 만들면 아무리 품질이 좋아도 중국 가격에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위는 활을 떠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됐다. 울며 겨자 먹기로 바이어 시킨 대로 할 수밖에 없지만 투자기업마다 인건비 외에는 유리한 것이 없이 울화통이 터진다. 그렇다고 마땅한 투자처도 없다. 최근 2~3년간 해외투자가 다소 소강상태를 보인 것은 개성공단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남북 관계가 호전되면서 인건비 저렴하고 풍부한 인력에 물류비 싸고 무관세인 개성공단이 대안으로 꼽혔다. 이마저 북미 관계가 예상외로 꼬이면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기’가 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최저임금은 가파르게 오르고 주 52시간제까지 시행되면서 기업마다 생사기로에 몰렸다. 자동차, 반도체, 석유화학 등 잘 나가던 업종이 어려워지자 정부가 4년간 10조원을 지원한다지만 섬유는 국물도 없는 것 같다. 첨단산업의 젖줄이었던 섬유산업은 크건 작건 아직도 전체 제조업의 11%인 4만 8000개 업체가 존립하고 있다. 섬유 제조업 고용인원 역시 29만 4000명으로 전체 제조업의 7.2%를 차지한다.
돌아가는 통박은 섬유산업이 유지 발전은 커녕 갈수록 붕괴속도가 가속화되고 있다. 사실상 명맥만 남은 면방에서부터 62년 역사의 코오롱 화섬  사업이 문 닫을 정도로 화섬분야까지 업스트림부터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봉제는 가장 먼저 공동화(空洞化)된 채 쭉정이만 남았다. 허리 부문인 직물 산업만 염색 등 관련 산업과 명맥을 유지하지만 이것도 이대로 가면 시간문제다.
그렇다고 섬유산업이 이대로 백기 들고 공멸을 바라만 보고 있을 것인가! 절대 그럴 수는 없다.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국제 교역환경도 급변하고 있다. 섬유산업에 대한 노하우와 200개 국가에 구축한 광범위한 시장을 사장시킬 수 없다. 결코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때마침 미·중 무역전쟁이 격화되면서 우리 섬유 의류 수출에 반사이익도 기대할 수 있다. 변수는 있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1·2차 도합 5000억 달러 상당분에 25%의 관세 폭탄을 투하하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고 있다. 연간 405억 달러 이상을 미국에 수출하는 중국산 섬유 의류는 치명타를 입게 된다. 기존 기본관세 15~32%에 25%를 추가하면 중국산 섬유의 대미수출은 조종(弔鐘)을 울릴 것이 뻔하다.
상대적으로 올해로 한·미FTA 발효 8년째에 접어든 한국은 사실상 무관세 혜택을 받고 있다. 중국이 기본관세 32%를 적용받는 초민감품목도 우리는 6%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산에 25%가 추가되면 중국산은 설 땅이 없어진다. 물론 가장 큰 수혜는 베트남, 인도네시아, 방글라데시 또는 중남미 국가다.

 

국내산업 자동화 투자 집중할 때다.

한국도 하기에 따라 예상외의 호재가 될 수 있다. 봉제 산업이 공동화됐지만 아직도 하이패션 제품의 디자인력과 숏딜리버리는 중국, 베트남, 중남미 국가가 따라오지 못한다. 이 극한 상황에서도 최신물산은 ‘메이드인코리아’ 의류를 연간 3000만 달러씩 수출한다. 한국이 경쟁력을 자랑하는 니트 직물과 폴리에스테르 직물은 한·미FTA 양허 기간 10년 종료 시점이 다돼 거의 무관세 혜택을 활용할 수 있다.
문제는 섬유 의류 기업인의 신념이다. 해외투자 환경이 갈수록 어려워진 상황에서 해외투자 규모의 절반만 국내에 투자하면 안정성장을 누릴 수 있다. 설비자동화로 인력을 줄이고 생산성과 품질로 맞서면 차별화 틈새시장을 충분히 장악할 수 있다. 지금도 중국이 장악하는 대미 섬유·의류 시장에도 틈새시장은 널려있다.
우리 섬유 의류업계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강한 내공을 갖고 있다. 디자인력과 순발력은 둘째가라면 서럽다. ‘불감청 고소원’이지만 중국이 미국에게 패대기 당할 때 우리에게는 천재일우의 호기다. 그치지 않는 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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