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림방적 전신 前 판본방직 회장
-제일교포기업인 日서 사카모토방적 세워 대성
-방적 사업으로 일본 경제계 거목돼 63년 산은 관리 태창방 인수
-전성기 때 주일 한국 대사관 부지 건물 인수 한국 정부에 기증
-싯가 1조 원, 판본방을 방림방으로 개명 베트남 이전

 

서갑호 전 판본방 회장

해외에서 거액의 부를 쌓아 모은 재산을 모국을 위해 쾌척한 훌륭한 기업인 3인에 대한 초· 중· 고교 교과서 수록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재일교포 기업인 출신인 전 방림방적 오너인 서갑호 씨가 포함돼 화제를 모으고 있다.

정부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고국에 거액을 지원한 서갑호 방림방적 전신 판본방직 회장(1915~1976)과 러시아에서 최고 부자가 된 최재형 선생(1860~1920), 미국에서 쌀농사로 큰돈을 번 김종림 선생(1886~1973) 등 3인의 업적을 초· 중· 고교 교과서에 싣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중 우리나라 섬유산업 선구자인 서갑호 선생은 어린 나이에 일본에 건너가 모진 고생 끝에 사카모토 방직공장을 운영하면서 부를 축적해 현 주일대사관부지와 건물을 고국에 기증했으며 이 부지는 현 시가로 따져 1조 원대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갑호 선생은 1915년 경남 울산에서 태어나 14세 때인 1928년 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오사카의 상점 점원을 거쳐 베를 짜는 기술을 배웠다.
그는 해방 이후 폐기처분된 방적기를 사 모아 사카모토방직을 설립하며 승승장구했다.
일본에서 거상(巨商)으로 성장한 그는 1950년 오사카 내 고액소득자 1위, 1952년 일본 전체 부호 순위 5위에 오를 정도로 일본 재계 거물이 됐다.
이후 일본에서 잇따라 새 공장 설립과 부실경쟁사 인수 등으로 급성장한 그는 일본 ‘섬유 왕’으로 불릴 정도로 섬유산업의 간판 기업인으로 승승장구했다.
그는 또 1963년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과 같은 시기에 재일교포 고국 투자 권유를 받고 당시 산업은행 관리에 있던 태창방직(전 고려방직)을 인수해 판본방직으로 이름을 바꿨으며 바로 이 회사가 국내 대방(大紡) 중의 하나였던 방림방적의 전신이었다.
특히 그는 일제 식민지 시대 대한민국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일가를 위해 현 주일 대한민국 대사관 용지를 구입해 거처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후 이 용지와 건물을 1951년부터 대사관에 무상으로 대여했으며 1962년에 소유권을 정부에 제공하는 용단을 내렸다.
이 땅의 현재 시가는 1조 원에 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본이 한국에 설립한 이 방적공장은 해방 이후 경상대 이공학부(현 서울공대) 출신인 한국인 간부 홍종모 씨에게로 주인이 바뀌었으나 경영이 어려워 산업은행 관리로 넘어가 태창방직으로 바뀐 후 서갑호 선생이 인수해 사카모토 방직(판본방직)으로 바꿨다. 그 후 영등포 소재 공장은 방림방적으로 이름이 바뀐 채 시설을 베트남으로 이전했고 공장 부지는 아파트단지로 매각했다. 따라서 한국에는 방림방적 설비와 부지는 없다.
서갑호 회장의 아들이자 방림방 회장을 물려받았던 서상근 회장(1940년생)은 방림방을 정리한 후 현재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갑호 씨의 고국을 위한 거액 쾌척은 초· 중· 고교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로 역사적 의미가 크게 평가받고 있다.
한편 서갑호 선생과 함께 초· 중· 고교 교과서에 수록될 해외 한국 기업인 중 최재형 선생은 함경도 경원 출신으로 러시아에 건너가 상업으로 거액을 모아 1905년 한일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안중근 의사와도 인연을 맺고 독립운동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과 물품을 제공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또 김종림 선생은 1886년 함경도 정평에서 태어난 후 1906년 하와이로 이민해 미국에 정착한 후 쌀농사로 큰 부를 쌓았으며 임시정부의 비행학교 설립을 위해 농장 일부를 내놓고 비행학교 설립운영자금을 제공하는 등 독립을 위해 물신양면으로 적극 지원한 애국자로 평가받고 있다.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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