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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의 머리에 소년의 가슴 가진 디자이너하얀 불꽃 남김없이 사르고 떠난 앙드레김…어느새 6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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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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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8월 12일이면 디자이너 앙드레김이 우리 곁을 떠난 지 만 6년이 된다. 하지만 여전히 서울 신사동 ‘앙드레김 다자인 아뜨리에’는 오전 10시가 되면 어김없이 열리고, 배우 하정우 주연의 영화 ‘앙드레김’이 크랭크인을 앞두고 대중의 기대감을 부풀리고 있다.
분명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우리가 6년이라는 물리적 시간의 크기에 아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앙드레김이 그 만큼 넓은 대중의 폭넓은 사랑을 받아서일 것이다.
그의 패션 세계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는 게 사실이다. 고유한 패션 세계를 구축했다는 호평과 현실성이 결여됐다는 혹평이 공존한다. 하지만 그 대립의 기저에는 한국 패션디자인 역사상 이름 자체로 브랜드 가치를 갖고 시대정신을 담아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공감이 자리하고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앙드레김을 추억하고 기억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본지는 창간 23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패션의 관통하는 거목 앙드레김을 삶의 궤적을 돌아보고, 현재 ‘앙드레김 디자인 아뜰리에’를 운영하고 있는 아들 김중도 대표를 통해 앙드레김 브랜드의 현재와 미래를 조명하고자 한다.
많은 패션인들이 그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을 함께 나눴으면 하는 바람이다.
<편집자주>
 

금남의 벽 허문 첫 남성 디자이너
디자인 자체가 사치였던 1961년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명동에 있던 국제복장학원1기생으로 입학했다. 당시에는 대학에 의상학과가 없던 시절이라 국제복장학원 출신 디자이너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없었다. 금남의 분야였던 패션계에 새로운 지평을 연 인물이 바로 앙드레김이다.
이듬해인 1962년 그는 서울 소공동 조선호텔 앞의 ‘GQ 테일러’라는 양복점 한 켠을 빌려 ‘살롱 앙드레’라는 의상실을 열었고, 그해 12월 반도호텔에서 첫 복장쇼를 열면서 패션계에 입문했다. 불과 27살이었다.
그리고 당시 세기의 결혼으로 알려진 신성일과 엄앵란의 결혼식 의상을 만들면서 유명세를 탔다. 그의 디자인은 전후 복구와 성장에 매몰된 획일적인 사회 분위기와 눈높이를 멀찌감치 앞서 있었다. 국민 디자이너로서의 첫 발을 내딛은 셈이다.

패션향한 고집, 자신만의 세계 구축
앙드레김을 향한 시선은 존경과 찬사만이 아니었다. 화려한 스타일과 귀족적인 문양 등을 통해 고유한 패션 세계를 구축했다는 평과 함께 동시대성이 결여됐을 뿐 아니라 미디어를 통해 위상이 과장됐다는 지적이 항상 공존했다.
그는 가장 대중적인 디자이너였지만, 대중의 목소리에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호반응뿐 아니라 불호반응도 그를 향한 관심의 다른 모습일 뿐이었다. 자신만의 패션 세계로의 천착은 멈춤이 없었다.
동양적인 정서를 녹여낸 앙드레김의 옷은 그 특유의 아름다움으로 세계인의 극찬을 받았다. 특히 한국의 정서를 몽환적으로 표현한 ‘칠겹옷’은 그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한국적 원색의 오간자에 용, 사람, 나비, 잉어, 꽃, 새 등이 아플리케로 수놓인 일곱겹의 옷을 입은 모델이 애절한 우리 음악에 맞춰 한겹씩 벗으며 진행되는 피날레는 패션으로 전달할 수 있는 한국적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삼국시대 이후 우리의 궁중복과 화려한 비잔틴 예술의 조화가 모든 작품의 기본 모티브”라고 밝혔던 것처럼 동서양의 조화를 완벽하게 이뤄낸 작품이었다.
결혼식 장면으로 고정된 피날레 역시 앙드레김 패션쇼의 백미로 빼놓을 수 없다. ‘앙드레 김 무대에 서야 최고 스타로 인정받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연예인들에겐 선망의 무대이기도 했다.

위기마저 기회만든 국민 디자이너 
1999년 이른바 옷로비 의혹사건 진상조사 청문회에서 앙드레김은 의도치 않게 본명을 밝혀야 했다. 새 봉(鳳), 사내 남(男). 김봉남이었다. 그가 이름을 말하는 순간 방청석에서 폭소가 터졌다. 엄숙히 브라운관을 지켜보던 모든 국민들이 웃었다.
예기치 않게 웃음거리가 된 그는 당시 ‘국제엠네스티에 제소할 생각까지 했다’고 할 만큼 큰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그 모멸감은 길지 않았다. 국민이 그에게 보낸 웃음은 조소가 아닌 친근함의 표현이었다. 정치 공세로 시작된 청문회에서 그가 보여준 한결같은 언행, 세무조사 과정에서 밝혀진 그의 국산소재 애용과 성실 납세 사실은 더 큰 호감으로 작용했다. 어린이들마저 그에게 사인을 요청할 만큼 ‘국민 디자이너’로 거듭난 것이다. 화장품·속옷 분야까지 사업을 확장하며 큰돈도 모았다.
이처럼 그에게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만큼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그는 연예계와 정·재계를 아우르는 화려한 인맥으로도 유명했다.
매일 오전 5시30분에 일어나 신문과 방송의 뉴스를 체크한 뒤 지인들의 근황을 살펴 축하나 위로 전화를 빼놓지 않았다. 기자들 사이에서도 꼼꼼한 모니터로 유명했다. 주한 외교관들이 부임하면 취임 축하 꽃다발을 보내고, 이임할 때는 작별 파티는 물론 직접 패션쇼 런웨이에 모델로 서게 하는 등 민간 외교사절 역할도 톡톡히 했다.

대중의 사랑이 곧 앙드레김 브랜딩
디자이너 앙드레김에 대한 대중의 호감과 인정은 곧 앙드레김 브랜드의 가치상승을 의미했다.
2002년부터 앙드레김의 브랜드를 입은 화장품·보석·속옷·아동복·골프복·에어컨·신용카드 등이 줄지어 출시됐다. 삼성물산은 앙드레김 아파트를, 삼성전자는 앙드레김 가전을, 국민카드는 앙드레김 카드, 한국도자기는 앙드레김 식기를 선보였다. 시쳇말로 ‘대세’였고 ‘흥행 보증수표’였다.
그는 국제적인 공적을 치하하는 상의 수훈도 여럿이었다.
1982년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문화공로훈장을 받았으며, 1997년 한국 대통령 문화 예술 훈장을 받은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가 되었다. 1999년 샌프란시스코시 정부는 ‘앙드레김의 날’을 두 번이나 선포했고, 프랑스 정부로부터 2000년 ‘예술문학 훈장’을, 2008년 ‘보관문화 훈장’을 각각 수훈했다.
이밖에 1981년 미스유니버시티 수석 디자이너, 1988년 88서울올림픽 한국 대표선수 유니폼 디자인, 2003년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임명됐으며, 2007년 한국언론인협회 주최 ‘자랑스러운 한국인 대상’을 수상했다. 2008년에는 문화 훈장을 수훈했다.
2010년 타계 후 정부에서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며 한국 패션 발전에 이바지한 고인의 공로를 치하했다.

죽음, 그리고 아직도 가야할 길 
2005년 그는 대장암 진단을 받고 수술과 담석 치료를 받았다. 이후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왕성한 디자이너 활동을 진행했다. 병들고 노회한 디자이너라고는 믿기지 않는 에너지를 뽐내던 그였다. 하지만 2010년 7월 대장암과 폐렴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했고 한 달 뒤 증세가 악화돼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8월 12일 병상에서 바늘과 실을 손에서 내려놓은 그는 사랑하는 대중과 영원한 이별을 고했다. 
대한민국 전 분야를 통틀어서도 이름만으로 브랜드 가치를 갖는 개인은 많지 않다. 그의 철학과 추구한 이상을 전승해 앙드레김을 한국의 대표 브랜드로 키우는 일은 이제 우리 모두의 숙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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