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두절미하고 월마트, 타겟, 콜스, 페니, 메이시 백화점 등 미국의 크고 작은 유통회사의 결산기는 대부분 1월말이다. 12월말 결산이 많은 한국과 달리 1월말 결산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다. 연중 매출이 가장 많은 시즌이 11월 추수감사절부터 할라데이가 들어있는 12월이 있기 때문이다. 각 사가 12월 대목을 결산해서 한해 실적을 공개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대형 체인스토아나 백화점의 올 1월말 결산기 실적은 한마디로 초상집을 방불케 했다. 실적이 우등생 기업이라고 해봐야 고작 전년대비 매출이 1%내외 증가에 그쳤다. 대부분 전년보다 10-20%씩 매출감소로 풀이 죽어있다. 젊은이들이 인터넷을 통한 온라인 구매가 대중화 되면서 오프라인 매출이 급감한 것이다.
반면 온라인 판매는 수직상승하면서 아마존은 월마트 매출을 능가할 정도로 고도성장하고 있다. 하나의 예증으로 미국의 패션명가 갭(GAP)이 급격한 매출감소로 실적이 악화되면서 주가가 곤두박질 쳤다.

심상찮은 미국발 의류 불황

3월 매출이 전년보다 6%나 또 빠져 지난주 11일 갭 주가는 하루에 11.5%나 폭락해 2012년 이후 4년만에 가장 낙폭이 컸다. 작년 말 기준 매장 수가 3275개에 달한 갭의 전성기가 해가 저물고 있는 증거다.
갭뿐 아니다. 미국 소비자들에 낯익은 메이시 백화점도 올 1분기 순이익이 작년 동기 대비 40%나 감소한 1억 1600만 달러로 떨어졌다. 2009년 2분기 이후 최악의 실적이다. 대부분 어패럴 리테일러들이 대동소이해 동변상련을 앓고 있다. 그만큼 미국 경기가 기대만큼 좋지 못한데다 젊은이 뿐 아니라 다양한 연령층의 소비자들이 디지털 디바이스 쇼핑으로 전환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미국 백화점과 체인스토아의 대형 의류업체 CEO들은 주주들의 실적악화 항의에 곤혹을 치르고 있다고 한다. 전문 경영인들은 실적이 나쁘면 주주들로부터 가차 없이 인책을 당하기 때문이다. 궁색한 답변으로 곧 실적개선의 허풍을 떨고 있지만 시황이 쉽게 호전될 기미가 없다. 올 겨울 날씨가 지난 시즌처럼 이상난동이 아닌 혹한한파가 조기에 찾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는 천수답경영에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불황 조짐은 이미 작년부터 본격 감지하기 시작했다. 작년 9월 월마트 최고경영자가 전 세계 의류공급원인 벤더들 회의를 갑자기 소집한 바 있다. 이 자리에서 월마트 CEO는 앞으로 의류납품 단가를 대폭 내릴 각오를 해야 되고 이에 응하지 않은 벤더와는 거래관계를 끊겠다고 단호하게 밝히고 퇴장했다. 질문도 받지 않고 이의가 있으면 이메일로 연락하라고 퉁명스럽게 말하고 가버렸다고 한다.
나비의 날개짓이 폭풍을 예고하듯 이를 계기로 벤더들에게 납품단가를 사정없이 후려졌다. 치열한 경쟁관계에 있는 동종 유통업체도 따라했다. 매년 가격을 10-15%씩 후려치는 것이 연례행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세아 한세 한솔을 비롯한 우리나라 대형 또는 중견 벤더들은 바이어 요구를 묵살할 수 없는 처지다. 주 거래선에서 가격을 깎자고 압력을 넣어도 울며 겨자먹기로 수용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국내 대형벤더들은 매년 고속성장을 유지하면서 해외 소싱기지에 초대형 공장을 앞 다투어 만들었다. A사가 100개 라인을 건설해 종업원 1만명을 고용하면 B사, C사도 뒤질세라 같이 신 증설에 나섰다. 어느덧 경기불황이 닥치자 공장 가동에 비상이 걸렸다. 공장을 세우면 천문학적인 적자가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채산은 뒷전이고 우선 공장 가동을 위한 오더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이어들이 이 같은 다급한 벤더의 사정을 유리알처럼 들여다 보고 휘두르고 있다.
최근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등지의 한국 벤더 공장을 둘러본 업계 인사가 필자에게 들려준 얘기는 충격적이었다. 의류벤더들이 100개 라인 규모의 초대형 봉제공장을 건립하는 데는 투자비만 250억원 가까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런 대규모 투자를 경쟁적으로 감행했으나 막상 오더가 부족해 가동에 위협을 받는 공장이 여러 곳이더라는 것이다. 대형 벤더들의 과잉투자로 인한 부메랑이 불어 닥치고 있어 걱정스럽다고 실토했다.
국내 섬유패션업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분야가 해외에 매머드 소싱기지를 운영하고 있는 의류수출벤더들이다. 세아 한세 한솔 등 빅3만 해도 매년 매출과 영업이익이 수직상승하고 있다. 매출 규모도 12억 달러에서 17억 달러 규모의 천문학적 규모다. 영업이익 또한 500억원에서 1400억원에 달할 정도로 호황을 만끽하고 있다.
이들의 경영전략은 규모경쟁이다. 원가를 낮추기 위해 초대형 공장을 통해 생산성으로 커버하는 박리다매 전략이다. ‘더 크게 더 싸게 전략’으로 성공했고 앞으로도 이 전략으로 글로벌 경쟁을 치고 나갈 것이다. 물론 올해 시장상황이 어두워 지금까지와 같은 고도성장은 다소 브레이크가 걸리겠지만 그래도 벤더들의 성장은 일정 수준 유지될 것이 확실시 되고있다.
그러나 의류벤더들의 고도성장에는 자체 생산성을 통한 원가절감보다 원부자재 협력업체의 희생이 뒤따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벤더들은 바이어가 가격을 깎은 만큼 원부자재 협력업체에 전가해온 것이 당연한 코스였다.
원부자재 업체 역시 거래선을 잃지 않기 위해 벤더가 시키는 甲의 논리 앞에 울며겨자먹기로 따를 수밖에 없다. 벤더가 면사 가격을 정해놓고 최저가 입찰 붙이는 식으로 경쟁 붙이면 쌓인 재고를 털기 위해 덥썩 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국내 면방업체의 면사 판매가격은 아직도 원가대비 10%가 밑지고 베트남산 면사는 5%밑지는 실태가 응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면사뿐 아니라 편직원단도 매한가지다. “이번 오더가 적자나서 불가피하니 내려달라, 다음 오더에서 만회해줄 테니….” 하는 수없이 수용하지만 다음에도 이 같은 얘기는 반복된다. 이제나 저제나 만회해줄까 하고 적자를 감수해온 협력 원부자재 업체는 어느날 갑자기 거래 벤더의 본부장이나 핵심간부가 실적부진 책임을 지고 잘리고 나면 지붕 쳐다보듯 허탈해 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협력 원부자재 업체들은 인건비가 싸 다소 여유가 있다. 국내에서 고임금과 인력난 속에 겨우 시난고난 기업을 유지하는 원부자재 업체들은 갈수록 줄어드는 거래량으로 기진맥진 할 수밖에 없다.

편직 염색업체까지 집단 탈출

자금력이 있는 면방회사들이 베트남의 방직공장에 자체 또는 컨소시엄으로 대규모 편직 염색 공장 설립을 잇따라 추진하고 있다. 편직염색을 겸한 전문 원단밀의 해외공장 확장은 물론 신규 진출이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생산 캐퍼도 편직 염색 함께 1일 5만kg가 최소단위다. 개별적으로 진출한 전문 업체의 해외공장과 별도로 대방(大紡)들과 컨소시엄으로 매머드 설비를 현지에 구축하면 국내로 오는 오더가 급감할 수밖에 없다. 남아 있는 국내 산업은 갈수록 오더기근으로 피골이 상접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경쟁국에 오더를 몰아주는 해외진출을 막을 수도 막아서도 안 된다.
오더가 마른다는 것은 기업에게 사형선고다. 계속되는 섬유산업의 엑소더스(집단탈출)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고단위 처방이 무엇인지 그 대안이 발등의 불이다. 어영부영 이대로 가면 게도 구럭도 다 놓치는 것은 불문가지다. 노송(老松)이 무덤을 지키는 것도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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