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는 부단한 창작으로 자기 색깔 찾아야”

- 7년 연속 해비타트 패션쇼 참가

- 봉사 오히려 에너지·용기 북돋워

- 숍오픈 30주년 마니아 고객 덕

- 화려한 설영희 스타일 자부심

- 작년 침묵깨고 콘테스트 도전

2015 해비타트 자선 패션쇼에 참가한 설영희 디자이너

요즘에는 고급 와인보다 개성있고, 모험심있는 작은 와이너리의 부티크 와인이 각광을 받는다.그런 작은 와이너리의 와인은 대량으로 생산되고 긴 시간 유통을 거쳐 대형마켓 매대에 진열된 와인과는 다르다. 다수의 평균적인 사람에게 맞추기보다 자신의 오랜 고집이나 새로운 시도를 담았다. 와인뿐 아니다. 대형과 평균에 지친 사람들은 이제 수공적이고, 개인적인 것을 원한다. 그것이 바로 부티크다.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마리에블랑의 설영희 대표의 옷은 고집스럽고 자기 색 뚜렷한 부티크 와인이 분명하다. 옷은 정성으로 '짓는' 것이라며, 디자인은 물론 직접 원단을 골라 염색하고 바느질도 마다 않는 그.

그를 지난 17일 한국 해비타트 자선 행사장에서 만났다. 주류 패션디자인계에선 두문불출하지만 해비타트만은 벌써 7년째다. 패션쇼 리허설을 막 마치고 나와 인사를 건네는 그의 목소리에선 윤기가 흘렀다. 설렘이었다.

 

“더 많은 디자이너 나눔·봉사 나서길”

2015해비타트 패션쇼의 오프닝을 장식한 슈퍼모델 이평

해비타트는 전 세계의 열악한 주거환경에 고통 받는 사람들이 제대로 된 집에서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세계 80여개 국가에서 활동하고 있는 단체다. 1976년 활동을 시작한 이후 지난해까지 집짓기나 집고치기를 통해 80만채 이상의 집을 세우고, 400만여명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집에서 새 삶을 시작하도록 도왔다.

설 대표는 해비타트에서 집짓기 봉사 참여는 물론 올해로 일곱 번째 자선 패션쇼까지 진행하고 있다. 시작 단계부터 모든 것을 자비로 준비해야 하는 만큼 물리적인 시간과 금전적인 부담도 적지 않지만, 7년 동안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있다.

“처음에는 해비타트 측에서 먼저 제안이 와서 데면데면 시작했어요. 이렇게 오랫동안 하게 되리라고는 그땐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직접 현장을 찾아 봉사를 해보니 생각이 달라지더군요. 정말 세상에는 얼토당토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이웃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 전에는 ‘사지 멀쩡하면 길거리에 나가 김밥이라도 팔라’고 쉽게 말했는데, 그마저도 어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매년 올해가 마지막이라고 마음먹지만, 그럴 수 없더라고요.(웃음)”

해비타트는 그에게 더 넓은 사유로 가는 통로 역할도 했다. 그는 “해비타트 봉사를 시작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이들을 통해 디자이너 이전에 온전한 자아로 자신을 바라보고 객관화할 수 있었다”며 “패션 디자이너로서 한동안 일체 외부활동을 접고 두문불출하기도 했지만, 해비타트 봉사를 통해 스스로 에너지를 얻고 채찍질하며 다시금 세상으로 나올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고 말했다.

2015 해비타드 패션쇼 런웨이에 선 일반참가 모델

설 대표의 옷은 패션계에서도 컬러와 패턴 디자인이 독창적이기로 유명하다. 무지개와 여름꽃을 콘셉트로 한 이번 해비타트 자선 컬렉션도 중년여성들이 모델로 런웨이에 섰지만 초청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해비타트 측에서 무료 지원하는 메이크업과 헤어도 모두 자비로 진행한다. 돈을 지불하고 티켓을 구입한 참관객들에게 무료한 쇼를 보여주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모델들에게 풍성한 가발을 씌우고 그 위에 티아라까지 더했다.

특히 설 대표는 한복 패션쇼로 다소 가라앉은 행사장 분위기를 슈퍼모델 이평을 앞세워 단숨에 반전시켜 집중도를 높이는 운영의 묘까지 발휘했다. 7년간 해비타트 컬렉션을 진행한 그만의 노하우인 셈이다.

쇼를 마친 설 대표는 패션 디자이너들이 사랑을 받은 만큼 나누고 베풀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저뿐만 아니라 많은 패션 디자이너들이 평균 이상을 누리며 대중의 큰 사랑까지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베풀고 나누는 데는 아직 많이 모자란 것 같습니다. 굳이 해비타트가 아니더라도 더 많은 패션 디자이너들이 갖고 있는 좋은 재능을 통해 더 큰 가치를 나누고, 소외된 이웃을 돌아봤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해비타트 집짓기 봉사에 나선 설영희 디자이너(오른쪽 세번째)

 

“고객은 나의 힘! 정성으로 옷 지어야”

설 대표는 논노에서 니트와 우븐을 총괄했고, 제일모직 골덴니트에서도 여성복을 총괄했다. 그리고 1986년 압구정 갤러리아 맞은편에 설영희 부티크 1호점을 오픈하고 오뜨꾸띄르를 처음 시작했다. 오로지 설 대표의 디자인을 쫒아 이방자 여사, 가수 김추자 등 당대 내로라하는 정재계 인사들이 그녀의 숍을 찾았다.

2015 설영희 마리에블랑 패션쇼

그는 올해로 30주년을 맞은 패션계의 존경받는 원로지만, 스스로를 실수투성이 디자이너라고 평가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숍을 내고 저를 찾는 손님들이 많아지면서 백화점에 매장을 늘리고, 프랑스 파리에도 사무실을 냈습니다. 웨딩드레스 사업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사업적인 마인드가 전혀 없었어요. 욕심이었습니다. 실패도 하고 사기도 당했습니다. 고비에서 절 지탱해준 건 제 옷을 잊지 않고 찾아주는 고객들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디자이너지 사업가는 아니구나’ 뼈저리게 실감했죠. 그리고 디자이너는 사업의 규모가 아니라 내 옷을 입어주는 이들로 인해 자존심이 선 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웃음)”

그래서 설 대표는 여전히 옷에는 ‘정성’이 들어가야만 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집을 ‘짓고’, 밥을 ‘짓는’ 것처럼, 의식주의 하나인 옷도 정성을 담아 지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고객이 원한다면 여성복은 물론, 남성복·드레스·아동복까지 직접 짓고, 원단부터 단추까지 직접 발품을 팔아 최상의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세월이 지나도 자신을 찾아주는 고객들에 의리(?)를 지키는 그만의 방법이기도 하다. 또한 매년 두 번 개최하는 개인 컬렉션에 300여명의 순수 고객이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설 대표의 의리는 고객뿐 아니라 업계 선후배 관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날 해비타트 행사장에도 박윤수 디자이너, 이용렬 전 패션협회장 등이 그를 응원하기 위해 참석했다.

이제 이순(耳順)을 넘어선 디자이너지만 그의 창작에 대한 열정은 여전하다. 그의 옷은 화려한 컬러와 패턴으로 누가 봐도 한 눈에 설영희 스타일이라고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자신만의 패션세계를 튼튼하게 구축하고 있다. 하지만 고객들 가운데는 “이런 옷을 어떻게 입냐”고 손사래를 치는 이들도 있었다. 처음에는 속도 많이 상했지만, 때로는 꾸짖고 때로는 설득하면서 끝내 그들을 충성도 높은 고객으로 만들었다.

설 대표는 자신의 독특한 스타일로 인해 얻은 것도 있지만, 잃은 것도 많다고 말한다. 하지만 ‘창작’만큼은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업성과는 별개로 디자이너는 창작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더 큰 성장을 못했을 수도 있지만, 저를 인정하고 공감하는 마니아들이 있습니다.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저만의 색깔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디자이너 꿈 아들위해 콘테스트 출전”

지난해에는 차남인 양현준 군이 F/W 패션쇼에서 패션 디자이너로 데뷔했다. 아직 고등학교 3학년인 소년이지만,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의지만큼은 설 대표도 꺾지 못할 만큼 강했다. 어깨너머로 배운 미싱·패턴 작업 등을 직접 하며 옷을 만들었다.

“아들이 하겠다고 하니까 시키지만, 전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참견하거나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냥 하는 대로 놔둡니다. 지난 컬렉션에 선보인 의상이 운좋게 몇 벌 판매되기는 했지만, 옷을 한 벌 파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스스로 깨달아야 합니다. 고생을 하고 좌절을 맛봐야 진짜 디자이너로 성장할 수 있죠.”

이번 해비타트 패션쇼가 끝나고서도 모니터를 꼼꼼히 하는 아들이 건방지다면서도 뿌듯한 미소는 숨길 수 없는 설 대표. 당찬 여장부인 그도 어쩔 수 없는 어머니였다.

2015 패션쇼에서 공개한 양희준 군 작품

설 대표는 1986년 오뜨꾸띄르 디자이너로 데뷔 후 국내외 전시회와 박람회를 넘나들며 왕성한 활동을 펼치다 1990년대 후반 개인 컬렉션 외에는 모든 대외 활동을 접었지만, 지난해 오랜 침묵을 깨고 제 45회 중앙디자인콘테스트에 지원해 자식뻘인 후배들과 경쟁에 나섰다.

“아들이 디자이너를 한다니까 엄마로서 보여줄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제가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물론 처음에는 망설였죠. 하지만 내가 왜 두려운가를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경력이 길어서? 나이가 많아서? 내가 한다면 한다. 누가 뭐라고 할거야…’라고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자식 앞에선 못할 게 없더라고요.(웃음)”

이 콘테스트에서 그는 입선의 영광을 안았다. 그의 네임밸류를 생각한다면 초라하지만, 눈부시게 아름다운 도전이었다. 굳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케케묵은 잠언을 차용하지 않더라도 설 대표는 여전히 젊은 디자이너임에 틀림없다. 충분히…

 

 

► 설영희 디자이너는 누구
- 논노패션 디자인실 (1980)
- 제일모직 디자인실 (1984)
- 설영희 부티크 오픈 (1986)
- 파리·동경 박람회 등 다수 참가
- 한국패션협회 박람회 등 다수 참가
- G20 영부인위한 포멀스타일 갈라쇼 2010 - 호주파트
- 한국 해비타트 기금마련 패션쇼 7회 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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