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잎 떨어지는 소리에 가을인가 싶더니 벌써 초겨울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알싸하다. 예년보다 한달이나 빠른 추위로 내수의류업계가 가을 장사를 망치더니 그래도 겨울용 중의류 판매가 늘어나 다행이다. 지난주 5박6일 일정으로 파리에 갔다가 새삼스럽게 느낀 두 가지가 무심 이상으로 가슴에 남는다. 우선 한국의 TV와 신문을 보지 않았더니 그렇게 머리가 한결 개운할 수 없었다. 너 죽고 나 살자는 정치권의 진흙탕 싸움을 보고듣지 않아 가장 큰 스트레스가 해소된 것이다. 민주주의 적이었던 사회주의 혁명주의자 레닌마저 "정치는 환자 한명의 병을 고치는 의사의 기술이 아니라 수백만명의 목숨을 좌우하는 예술이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우리네 정치판은 수백만명의 뺨을 때려 눈물을 흘리게 하는 가장 후진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지 않는가. 명품상혼 서울은 몇시인가 또하나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둘러본 상제리제 명품가와 백화점에서 가슴을 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루이뷔통' '샤넬'을 비롯한 명품상가에 한국인 고객이 가장 많이 눈에 띤 점이다.파리시내는 물론 고속도로에도 우리네 '프라이드' 크기의 소형차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전문점을 애용하는 시민들의 알뜰구매에 고개가 숙여지면서 흥청망청 싹쓸이 쇼핑을 즐기는 한국인들에게 스스로 수치심을 느꼈다. 마치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로 착각할 정도로 한국인 쇼핑객의 씀씀이는 세계 제일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표피적인 애국심은 명품가격을 확인하면서 조금씩 엷어지기 시작했다. 이들 명품의 가격이 하나같이 한국에서 팔리는 가격의 1/3 또는 1/2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쇼핑객들이 하나같이 "이 제품이 서울에선 얼마인줄 아세요"하는 식이어서 구매충동을 자극하고 있는 이유를 알수 있었다. 한마디로 한국보다 1/3가격에 명품을 살수 있으니 자연스럽게 우리 여행객들이 체면불고하고 보따리 단위로 물건을 사는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한국에서 명품을 사는 소비자들은 '봉'이라는 사실에 새삼 부끄러움과 분노를 떨칠 수 없었다. 파리나 밀라노보다 2∼3배나 비싼 가격을 주고 바가지 상혼에 휘둘리는 우리 소비자들의 무지몽매한 행태에 동정과 저주가 교차했다. 한마디로 우리의 의식과 유통구조의 후진성이 어느정도인지 실감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 또 한편 이같이 값싸고 질좋은 명품을 가까이 접근하고도 지갑하나 사지않은 필자의 청승을 지켜본 낯 모르는 한국인들의 눈길이 그순간 몹씨 따가움을 느꼈다. 물론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고 명품하나쯤 갖고 싶지 않았겠는가마는 안사는 것이 아니라 못사는 필자의 고집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다시 화제를 바꿔 때마침 대구 PID와 함께 아시아의 대표적인 섬유소재전을 표방하며 개최된 PIS(프리뷰인서울 2002)가 3일간의 일정을 끝내고 지난 30일 폐막했다. 단순논리는 분명 바이어 내방객이나 계약·상담실적에서 대구 PID보다 뒤처진다고 비판할 수 있으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꾀 많은 수확을 거두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이번 PIS에 다녀간 외국인 바이어는 연 인원 1,720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계약실적 4억달러에 상담실적이 13억달러 였다면 결코 작은 성과가 아니다. 물론 지난 3월에 개최된 대구 PID에 비해 바이어수나 계약실적이 다소 못미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구가 36억원의 예산을 들여 해외바이어 항공료와 숙박비까지 부담한데 반해 이번 PIS는 불과 9억2,000만원에 불과한 옹색한 살림을 살았다. 이 작은 예산으로 이정도 성과라면 결코 실패한 행사는 아닌 것이다. 여기에 당장 집계되지 않았지만 PIS에 참석한 바이어들이 개별적으로 찾아와 상담한 금액이 상당 규모에 달한 것으로 밝혀져 '남의 물에 게 잡는' 어부지리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성과로 나타나고 있다. 더욱이 이번 PIS를 계기로 우리가 중시할 것은 언제나 그랬지만 이번에도 참가업체별 부익부, 빈익빈 양극현상이 어느때보다 극명했다는 점이다. 350개부스 180개사가 참가한 이번 PIS에서 어떤 업체는 바이어가 넘쳐 대박이 터졌고, 상대적으로 바이어가 눈길도 안줘 파리날린 좌절의 업체도 많았다. 실제 어떤 업체들은 상담원 8명이 하루종일 식사도 거른채 밀려오는 바이어와 상담하기에 눈코 뜰새없이 바빴고 반대로 개점휴업상태로 내년에는 출품하지 않겠다는 오기스런 업체도 있었다. 그렇다면 어떤 업체에 해외 바이어가 몰렸는가 하는 점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역시 세상이 바뀌어 가격은 뒷전이었다. 가격이 아무리 높아도 품질에 차이가 나면 바이어는 몰렸다. 기능성 소재나 후가공 제품쪽에 바이어가 집중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기업 크고 작은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어정쩡한 일반제품에는 바이어들이 눈길도 주지않았다. 중국에서 만들 수 없는 기능성, 차별화소재와 후가공쪽에 눈을 불키고 계약에 열을 올린 모습이 역력히 드러났다. 따라서 이번 전시회를 통해 명제는 분명히 설정됐다. 기능성 또는 독특한 복합소재나 후가공쪽에 대한 시장잠재력이 확인되면서 아주 고가이거나 그렇잖으면 아예 중국보다 싼 제품만이 살아남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번 PIS에 선보인 국산제품의 90%는 중국에서 생산되고 있거나 거의 한국수준에 육박한 제품들이다. 이런 대전제에서 신소재와 가공기술 개발이 당면 현안임을 다시한번 확인한 셈이다. 더불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참가업체나 주관단체, 정부 모두 단순한 실적에 일희일비 할게 아니라 이같은 전시사업을 앞으로 집중 육성하고 참여하겠다는 결연한 자세가 필요하다. 프랑크푸르트의 메세는 그 지역 전체가 전시회로 먹고살 만큼 세계적인 전문전시회나 박람회의 메카로 통한다. 파리 프리미에르비죵이나 텍스월드는 세계 최고권위의 소재전시회다. 러시아의 모스크바 섬유전시회도 무려 84개에 이르는 매머드 전시장을 발판으로 세계적인 전시회로 발돋움하고 있다. 중국도 광동페어, 상해전시회, 북경전시회를 포함, 세계적으로 공인받는 섬유전시회가 여럿있다. 세계적인 섬유전시회 없다 불행하게도 한국은 세계적인 공인 섬유전시회가 없다. 국제섬유전시회야 말로 한국 섬유수출 증대의 기폭제이자 외국바이어들이 운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이번 PIS와 봄철 대구 PID를 세계적인 섬유소재전시회로 육성해야 할 당위성이 여기에 있다. 정부가 이부문에 대한 과감한 지원을 해야 한다. 다만 이번 10월말의 PIS는 시기선택의 문제점이 노출됐다. 10월초의 중국 섬유교역전과 연이어 개최되는 문제점을 감안해 내년에는 9월초로 앞당겨야 한다. 그래야 바이어가 몰려 올 수 있다. 그리고 장소도 바뀌어야 한다. 이미 금년에는 일정이 잡혀 어려웠지만 학여울 서울무역전시장은 너무 후미진 곳이다. 바이어들의 편의를 위해서도 코엑스로 바뀌어야 한다. 이런점만 보강하면 전시회 구성이나 전반적인 소프트웨어 모두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얻을려는 조급성은 안된다. 세계적인 섬유소재전을 향한 대장정은 이제 한걸음 한걸음 거보를 딛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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