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김 당신은 대한민국 모두의 자랑입니다

지난해 8월 12일 오후 7시 25분.
온 국민의 슬픔과 애도 속에 향년 75세의 나이로 타계한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디자이너 고(故) 앙드레 김.
대한민국은 앙드레 김이 있어서 축복받은 나라라고 했던 주한 외교대사들의 말처럼 백의(百衣)의 거장 타계 1주년을 앞두고 본지는 특별 기획으로 디자이너 앙드레 김의 업적과 행적을 회고한다.

앙드레김 탄생

1935년 8월 24일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구파발리(현재 서울 은평구 구파발동)에서 2남 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중학교 때 한국전쟁이 나자 부산으로 피난을 한영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했다. 우연히 패션쇼를 구경하다 디자이너 최경자와 인연을 맺었고, 최경자의 양장점에서 일을 도왔다.
1961년 국제복장학원에 1기생으로 입학해 1년 간 패션 공부를 했다.
이 무렵 프랑스 대사관의 한 외교관이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될 수 있는 쉬운 외국 이름인 ‘앙드레’라는 이름을 지어주면서 앙드레 김의 출발은 시작됐다.
1962년 서울 소공동 조선호텔 앞의 ‘GQ 테일러’라는 양복점 한 켠을 빌려 ‘살롱 앙드레’라는 의상실을 열었고, 그해 12월 반도호텔에서 첫 패션쇼를 개최하며 한국 최초의 남성 디자이너로서 패션계에 데뷔했다.
그의 나이 겨우 27살이었다.
1964년 당시 톱스타였던 엄앵란의 웨딩드레스를 디자인한 것을 시작으로 스타들의 의상을 디자인하며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1966년 그는 파리에서 패션쇼를 개최한 최초의 한국인 디자이너로 이름을 올렸다.
패션쇼 이후 프랑스 현지 신문 르 피가로는 그의 무대를 보고 선경(仙境)의 마술이라 극찬했다.
이후에도 그는 뉴욕, 워싱턴, 바르셀로나, 카이로, 시드니, 베이징, 상하이, 발리, 캄보디아를 포함하여, 국내 및 해외 수많은 패션쇼를 개최했다.
그는 항상 “패션은 국제적인 청중들에게 한국의 풍부한 문화와 예술을 소개하고 강조하는 중요한 도구”라고 믿고 있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이집트 피라미드와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사원에서 세계 최초의 패션쇼를 열며 세계 패션 역사를 새로 쓰기도 했다.
그 때마다 “나는 내 나라와 아시아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국제적으로 유럽의 예술과 문화는 잘 알려져 있지만 내 예술 패션 컬렉션을 통해 한국의 풍부하고 높은 예술문화를 보여주고 싶었다. 패션과 함께 예술과 문화의 상상력을 결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나는 한국의 뛰어난 문화와 세련되고 예술적인 패션을 통해 세계 각국 시민들의 감동을 받고 싶다”고 했다.

세계가 인정한 디자이너

그만의 ‘패션 아트 컬렉션’은 동양과 유럽 문화를 융합시켜 아름답고 화려한 작품들을 쏟아냈다.
50년간 작품 생산과 창작 뢀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그는 매 쇼마다 새로운 작품을 쏟아냈다.
특히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나무와 꽃 용과 잉어 등 동양적인 모티브를 담은 풍부한 자수, 황금빛과 눈부신 원색의 화려함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받았다.
세계의 톱스타 마이클 잭슨, 나스타샤 킨스키, 브룩쉴즈가 시상식과 콘서트 등 특별한 무대에서 그의 의상을 즐겨 입도록 만들기도 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친선 대사 또는 롤 모델로 단순한 패션쇼가 아닌, 국제적인 외교와 지역 사회와 긴밀한 유대 관계를 이끌어 낸 인물로 평가됐다.
특히 그의 패션쇼 무대 위에는 송승헌, 장동건, 원빈, 권상우, 이영애, 김희선, 최지우, 김태희 등 톱스타들은 별이 되기 전 반드시 그의 의상을 입었다.
디자이너 앙드레김의 성공은 앙드레 김 브랜드를 재배하면서 정점을 찍는다. 2002년부터 화장품·보석·속옷·아동복·골프복·에어컨·신용카드 등이 출시되었다.
삼성물산은 앙드레김 아파트를, 삼성전자는 앙드레김 가전을, 국민카드는 앙드레김 카드, 한국도자기는 앙드레김 식기를 최상급 ‘스타’ 제품으로 출시했다.
그의 국제적인 공적을 치하하는 많은 상도 받았다.
1982년 그는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문화공로훈장을 받았으며, 1997년 한국 대통령 문화 예술 훈장을 받은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가 되었다.
1999년 샌프란시스코시 정부는 앙드레 김의 날을 두 번이나 선포했고 2000 년에 그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 문학 훈장을 받았다. 2008년 보관문화훈장 등을 수상했다.
국내에서도 1981년 미스유니버시티 수석 디자이너, 1988년 88서울올림픽 한국 선수 유니폼을 디자인, 2003년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임명된 그는 2007년 한국언론인협회 주최 자랑스러운 한국인 대상을 수상했고, 2008년 문화 훈장을 수여받았다.
지난해 사후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며 한 평생 한국 패션 발전에 이바지한 고인의 공로를 치하했다.

그는 떠났지만 앙드레김 브랜드 사업은 확장

이제 고인이 된 디자이너 앙드레김.
그는 없지만 그가 해온 행보는 여전히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현재 신사동 앙드레김디자인아뜨리에는 그가 타계한 이후에도 변함없이 바쁘게 돌아간다.
고 앙드레김의 아들 김중도 앙드레김아뜨리에 대표(31)가 의상실 운영과 라이선스 사업 등을 가업으로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다.
현재 앙드레김 의상실은 김중도 대표 체제하에 임세우 실장, 6명의 디자이너, 패턴 재단사, 봉제사 등 10년 이상 앙드레김과 함께 일해 온 20여명 장인들이 변함없이 근무하고 있다.
아뜨리에를 찾아오는 고객들도 1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30년간 앙드레김과 함께해오며 지금도 의상실을 운영하고 있는 임세우 이사는 “성악가 조수미씨를 비롯해 공연의상을 위해 방문하는 고객들은 1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면서 “특히 선생님 돌아가시기 전부터 맞춤 정장을 주문하시던 단골 손님들 중에서는 선생님을 기억하고 싶다며 이전보다 더 자주 주문하러 오신다.”고 말했다.
10여개 넘는 라이선스 사업도 활기를 띠고 있어 향후 아웃도어와 캐주얼 등으로 확대시킬 계획이다.

앙드레김 영원하리

패션 불모지였던 60년대부터 디자이너를 시작해 평생토록 소원했던 그의 꿈이 완성된 곳은 다름 아닌 지난해 완공한 경기도 기흥 아뜨리에.
매년 봄 여름 가을 겨울 자연을 풍경삼아 아틀리에에서 패션쇼를 열겠다던 그는 세상사름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자신만이 공간을 남겼다.
그는 없지만 이제 그의 업적과 공적을 한눈에 보여주는 앙드레김 박물관이 이곳에 건립된다.
대한민국을 대표해 한국 패션의 선구자이자 개척자인 디자이너 앙드레 김.
이제 많은 이들이 디자이너 앙드레 김의 모습을 영원토록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조정희 부국장 silky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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