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壞作用으로 무너진 R C ARCA(라디오 코퍼레이션 오브 아메리카)는 2차대전전 무선통신과 라디오 방송의 파이오니어였으며 전후에는 흑백TV, 컬러TV 등의 실용화에 앞장서 1980년대 중반까지만해도 세계적인 명문회사였다.주력사업은 전자, 통신, 방송기자재 생산이며 子會社로는 미국 3대 방송사중 하나인 NBC와 개(犬)마크의 레코드회사 RCA빅터, 렌터카회사 허츠 등이 있었다. 그런데 86년이후 대규모 M&A(기업매수) 선풍의 표적이되어 결국 외국기업의 산하회사로 전락하고 말았다.1919년 RCA는 전기기기회사 GE(제너랄 일랙트릭)와 그 라이벌사인 WH(웨스팅 하우스)의 합자회사로 발족했다가 反트러스트法에 따라 1930년에 독립한다.이때 사장으로 취임한 데이비드 사노프는 러시아에서 태어난 유태인으로 미국으로 9세때 이민, 신문, 전보배달을 시작으로 말코니無線회사의 급사, 무선통신사를 거쳐 RCA 발족때 영업부장으로 발탁되었으며 RCA독립과 더불어 39세에 사장이된 입지전적 인물.1970년 77세로 은퇴할때까지 40년간 사노프는 RCA를 민간용 전기기기업계의 왕좌로 끌어올렸고 그 자신은 라디오, 텔레비젼의 아버지로 추앙받았다.사노프의 후임으로는 아들인 로버트 사노프가 취임했는데 그는 사내분쟁에 휘말려 5년만에 쫓겨 난다.사노프 一家가 가지고 있던 RCA 주식은 1%도 안되는데 아버지가 아들에게 회장자리를 물려준다는 것은 당시 미국 산업계의 관행을 벗어난 것이었다.따라서 주변의 반감과 비판이 끊이지 않은데다 회장이 된후 실적도 보잘것없어 내분이 쿠데타로 이어진 것이다.로버트 사노프의 가장 큰 실패는 컴퓨터사업에 뛰어든 것으로 거액의 개발비를 투입, 동업계의 巨人 IBM 추격작전을 벌인다.사내의 반대를 무릅쓴 이 작전은 결과적으로 실패, 컴퓨터부문을 매각했지만 71년 결산에서 개발비 5억달러를 손실금으로 처리해야했다.로버트는 또 사장취임과 동시에 콩글로메리트 붐에 편승, 식품, 가구, 부동산, 출판 등 많은 회사를 사들였으나 적자가 누적돼 결국 포기하는 실수를 범했다. 해임당한 로버트의 뒤를 이어 사장이었던 앤서니 콘래드가 회장에 취임, 적자부문을 모두 정리하는 등 합리화작업을 벌여 76년 중반부터 실적이 호전되었으나 10개월만인 76년 9월 임원회의에서 그 또한 해임통보를 받는다. 해임 이유는 개인적인 탈세문제였지만 RCA 회장으로서 있을 수 없는일 이라는 것이었다.이어 부사장 그리피스가 후임으로 취임했으나 권력경쟁 등 복잡한 사내세력 다툼으로 실적이 계속 하락하는 가운데 노사분쟁도 끊이지 않았으며 주력상품인 컬러TV는 일본, 한국, 대만산에 밀려 80년대의 RCA는 이름만 名門으로 남은 전망없는 회사로 전락해 버렸다.이때 들이 닥친 것이 M&A 손길. GE에 64억달러로 매수당한 RCA는 그후 분야별로 분할매각되었고 주력업종인 TV, 오디오 등은 프랑스의 톰슨사에 팔려 RCA 브랜드의 전기전자 제품은 주로 미국시장에서 생산, 판매되고 있다.2년동안 사장 네번 바뀐 몬테지손세상에는 트러블이 있는 회사가 수없이 많지만 이태리의 <몬테지손>만큼 심하게 계속된 회사는 드믈 것이다.50년대말 일본에 '몬테지손 찾아뵙기'가 유행어가 되었을 정도로 유명한 이 회사는 前身인 <몬테카치니>가 개발한 '꿈의 섬유' 폴리플로필렌 제조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일본 섬유 화학회사들이 밀라노 소재 몬테카치니사를 앞다퉈 방문,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것이다.이 회사의 트러블은 폴리프로필렌이 각광을 받은 얼마후부터 시작되었다.파죽지세로 성장하던 몬테카치니가 지나친 적극경영으로 자금난에 빠진 것은 63년.석유화학분야에 참여하면서 외자까지 끌어들인 것이 화근이 되어 화학회사 <에디슨>사와 합병하므로써 유럽 제3위의 화학회사 몬테지손으로 변신한다.그러나 이 합병은 에디슨사가 몬테카치니를 흡수합병한 것이었으며 이 무렵 國策기업인 석유회사 <에니公社>도 화학공업부문진출을 위해 몬테지손株를 비밀리에 買集하고 있었다.에니공사는 같은 국책기업인 철강·조선회사 <이리公社>와 합동으로 몬테지손株 약 20%를 매집했고 69년에는 경영진에도 참여한다.따라서 몬테지손은 에니系, 에디슨系, 몬테카치니系 임원들이 뒤섞여 세력다툼을 벌이게 된다.70년초에디슨계 사장 조르지오 발레리오가 사임하고 국회의원 메르쯔고리가 후임으로 앉으면서 수익성이 없는 사업을 정리하려하자 에니공사계에서 정면으로 반대, 8개월만에 사장직을 물러나게 된다.그 후임으로 장관출신 간피리가 취임했으나 역시 사내분쟁에 휘말혀 5개월만에 사임하면서 '몬테지손이 쓰러지면 15만명의 종업원이 거리고 내몰린다'는 위기론이 팽배해졌고 수습방안으로 에니공사 총재인 체피스를 사장으로 전임시킨다.2년사이 사장이 네 번이나 바뀌면서 빈사상태에 빠진 몬테지손을 구하기 위해 체피스는 당분간 결손이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無配當을 선언했고 72년엔 반액  資도 단행한다.이어 그는 과감한 구조개혁에 착수, 화학섬유부문의 통합, 광산·금속부문의 축소, 석유화학·의약분야의 확충 등과 함께 알미늄 부문 매각 등 3년간 40여개 계열사를 정리했다.이런 와중에도 경영권을 둘러싼 분쟁이 끊이지 않았지만 74년엔 드디어 순익을 계산, 배당하기에 이른다.그러나 이듬해부터 제1차 석유파동여파로 세계적 불황으로 결손을 기록하면서 자금난까지 겹쳐 76년말에는 부채가 3조리라(약 10조원)에 달했다.위기의 몬테지손은 드디어 정부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게 되지만 이태리 정계의 정쟁에 휘말려 국책 枝株회사를 신설, 관리하기로 결정된다.그런데도 몬테지손은 내분에 경영위기가 계속되다가 81년 민영화되었고 M&A전문가 가르디니가 40%의 주식을 매집, 회장에 취임한다.가르디니의 과감한 구조조정으로 한때 몬테지손은 부활징조가 보였으나 90년대에 만연한 정·관·재계의 부패구조가 폭로되면서 자살했으며 다시 궁지에 빠진 이 회사를 93년말 현재 정부의 구제금융을 기다리는 신세로 전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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