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초를 다투는 글로벌 경제의 변곡점에서 무수한 기업의 생성과 소멸이 이어지고 있다. 제너럴일렉트릭(GE), 코닥, 노키아, 제록스 같은 전설적인 기업들이 불과 10년 사이에 소리소문없이 몰락했다. 반면 아마존, 구글, 테슬라, 넷플릭스, 페이스북 등 신생기업들이 단숨에 선도 기업으로 급 상승했다. 삼성전자도 언제까지 안심할 수 없는 냉엄한 불연속적인 변화를 방심할 수 없다.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는 삼성전자가 삐끗하는 사이 국가 대위국(大危局)으로 이어지는 것은 불문가지다.

전 세계적으로 기라성 같은 전설적인 기업들이 무수히 소멸하는 사이 산업 보수성이 강한 섬유패션 기업의 날개 없는 추락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우리 섬유 패션 스트림에서도 장단기와 무관하게 수많은 기업이 혜성처럼 등장했다 유성처럼 사라진 기업이 부지기수다.

벤더 상습 클레임 ‘甲질’ 너무 심하다.

1억 8000만 년 전 지구를 지배하던 공룡이 사라진 것도 변화에 부응하지 못한 탓이다. 섬유패션기업 중 소멸됐거나 소멸 위기에 놓인 기업 대다수는 기본적으로 변화를 외면하거나 둔감했기 때문이다. 면방·화섬·니트·화섬직물·염색가공 등 각 스트림마다 변화에 부응하지 못한 채 천수답 경영에 안주한 것이 결정적인 패착이다. 불황보다 더한 일대 공황의 모진 상황에서 순발력을 발휘해 글로벌 경영에 성공한 기업은 오히려 승승장구했다.

물론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에 고래 심줄보다 강한 생명력을 믿고 국내에서 섬유산업을 영위하는 것이 결코 녹록한 상황은 아니다. 고임금에 떡 쪄놓고 빌어도 현장에 오지 않는 인력난, 비싼 전력료 등 하나 같이 고비용·저효율 구조에서 생존하기가 쉽지 않다.

면방·화섬·직물·염색 등 전 스트림이 시난고난 골골하며 떡쌀 담그는 위기감에 봉착해 있다. 울타리가 사라진 글로벌 시대에 하늘이 무너져도 살아날 구멍이 있으리라 믿고 안주한 결과다.

여기에 국내 섬유산업의 소멸을 재촉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스트림간 상생 정신이 실종됐기 때문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국내 섬유 스트림 전반이 골골하는 상황에서 펄펄 나는 분야는 글로벌 의류 벤더들이다. 면방·화섬·니트·화섬직물·염색·사가공에 이르기까지 지금 이 순간 하나같이 생사기로에 서 있다. 반면 의류 수출 벤더들은 연간 수백억에서 1,000억 이상의 흑자를 만끽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치열한 국제 경쟁에서 눈덩이 흑자를 내며 고속 성장하는 의류 벤더의 일취월장은 당연히 박수를 보내야 한다. 하지만 이들 벤더의 고속 성장 가도에는 국내 섬유 스트림의 전폭적인 지원이 뒷받침됐지만 ‘甲’과 ‘乙’의 위치가 바뀌면서 독선과 횡포의 갑질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른다’고 자신들의 성장을 온몸으로 지원했던 원자재 업체를 철저히 배반한 경우가 허다하다.

사실 의류 벤더들이 해외 바이어로부터 대량 오더를 수주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바뀌었지만 치열한 경쟁을 뚫고 오더를 받아오지만 뒷배경은 한국의 안정적인 원부자재 산업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과거 일부 면방·화섬 업체들이 배급 주는 행태가 도마 위에 올랐으나 그래도 그들의 안정 공급이 벤더의 성장을 지원했다. 원단밀의 차별화를 앞세운 좋은 원단의 안정 공급이 없었으면 의류 벤더의 초고속성장 역시 불가능했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어 글로벌 의류 벤더들이 오늘의 위치로 우뚝 선 변곡점의 꼭대기에서 상황은 많이 바뀌었다. 장사가 5리(五里) 보고 10리(十里) 간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자신들의 마진을 극대화하기 위해 원사·원단 가격을 무자비하게 후려치는 것이 다반사가 돼버렸다. 멀쩡한 원단을 벤더 요구대로 정상적으로 공급했는데도 얼씬하면 품질 클레임을 쳐 가격을 후려치기 일쑤다. 애당초 소요량보다 적게 발주해놓고 득달같이 발주량보다 부족하다고 추가 공급을 요구하는 것은 흔히 보는 일이다.

의류 벤더마다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 등지에 매머드 소싱공장을 운영하면서 고리당 5달러만 차이가 나도 국내 면방사 거래를 중단하고 중국·대만계 공장에서 구매한다. 반면 중국 대만계 의류 벤더들은 설사 고리당 10~20달러가 비싸도 자국 기업 면사를 쓴다. 면사뿐 아니라 원단도 매한가지다.

봉제 불량으로 불거진 바이어 클레임을 원단 불량으로 둔갑 시켜 납품 가격을 후려치는 것은 상투적인 현상이다. 모 대형 벤더가 “원단 불량으로 생산된 의류를 바이어가 인수를 거부해 현지 창고에 쌓아있다”고 클레임을 쳐 원단밀이 현장에 가서 확인한 결과 엉뚱한 원단을 들이대 들통난 경우도 있다. 면사·화섬사·원단밀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개발한 신소재를 샘플 오더만 소량하고 중국 등 경쟁국 업체에 “이대로 싸게 만들라”고 주문하는 것 또한 보편화 돼 있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대형 의류 벤더는 주거래 원단밀에게 하도 잦은 억지 클레임을 제기해 거래 안 할 작정으로 원단밀 측이 벤더 오너와 대판 싸운 일도 있다. 某 벤더 회사 간부는 거래 원단밀로부터 챙긴 상납금액이 2억원 대가 넘어 잘린 사례가 본지에도 대서특필 됐었다.

그뿐 아니다. 의류 벤더의 얌체 상혼은 시도 때도 없이 원단업체에 샘플을 요구하지만 당연히 지불해야 할 샘플 차지를 주지 않은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다. 일본이나 유럽, 심지어 중국산 원단 샘플을 요구할 때는 철저하게 샘플 차지를 지불하면서 국산 원단은 공짜로 사용하고 있다. ‘乙’의 처지인 거래 원단업체가 샘플 차지를 요구하면 “언제 샘플 차지 받았느냐? 바이어가 선택하면 본 오더로 연결될 텐데 웬 샘플 차지냐? 며 핀잔을 준다.

샘플 차지 지급 신선한 충격

말이 쉽지 원사나 원단을 새로 개발해 샘플을 만드는 데는 적지 않은 돈과 인력이 소요된다. 연구개발 인력이 새로운 소재로 제·편직·염색 가공하는데 적지 않은 시간과 돈이 소요되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이런 잘못된 관행 아닌 폐단으로 원단 업체들이 연간 작게는 수천만원에서 10억 원까지 소요 비용을 떠안고 있다. 고스란히 원단 업체가 거래를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자체적으로 흡수한다. 이런 부도덕한 행동을 하고도 의류 벤더 상당수는 눈도 깜짝 않는다.

본지가 국산 원단 샘플 차지를 안주는 문제점을 들어 여러 차례 대서특필한 일도 있다. 이같은 지적이 효과가 있었는지 몰라도 최근 대형 의류 벤더가 “앞으로 원단 샘플 차지를 정상 지급하겠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만시지탄의 감이 있지만 이같은 거래 질서 정풍 운동이 의류 벤더 전체에 본격 확산되길 기대한다. 물론 개중에는 거래 원단밀에 클레임을 최소로 억제하며 국산 원단을 가급적 많이 사용하려는 양심적인 의류 벤더도 있다. 그러나 상당수 도덕적으로 병든 의류 벤더들 많아 각성하고 변해야 한다. 본지도 파수꾼으로 예의주시하며 날카롭게 지켜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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