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에 나오는 동물의 왕국을 볼 때마다 시청자들이 안타까워하며 공감하는 대목이 있다. 코뿔소나 얼룩말이 사자나 호랑이에 잡아먹히는 것을 보면 아무리 미련한 짐승이라도 저럴 수가 있을까 싶다. 코뿔소나 얼룩말이 떼로 지어 다니다 사자의 공격을 받으면 저만 살겠다고 줄행랑을 치다 처절하게 당하고 만다. 만약 코뿔소나 얼룩말이 각기 서너 마리만 뭉쳐 공격하는 사자를 뿔로 받거나 뒷발로 차면 사자나 호랑이가 나가떨어지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함께 공동 대응할 생각 않고 저만 살겠다고 도망가다 뒤처진 한 마리만 맹수의 희생물이 되고 만다. 기업 활동도 동물의 왕국 행태와 별로 다르지 않다고 본다. 성장을 위해 선의의 경쟁은 당연하지만 자기만 살겠다고 체면 불고한 행동을 하거나 시장 질서를 망가뜨리면 결국 부메랑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한마디로 섬유산업 각 스트림에 폭망징후가 넘쳐 곡소리가 울려 퍼지는 엄혹한 상황에서 함께 같이 가겠다는 상생의 정신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나만 살겠다며 ‘주식회사 한국 섬유산업’ 공동체에서 이탈하는 몰인정한 행태가 도를 넘기 때문이다.

 

롱패딩 100만장 판 기업 빛과 그림자

지난주 한 일간 경제신문에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중진급 섬유패션기업인의 전면 인터뷰기사가  대서특필됐다. 이 기업인은 내수 패션 시장에서 자사 SPA브랜드가 “5년 내 유니클로를 따라잡겠다”고 대단한 의욕을 과시했다. 모두가 어렵다고 힘들어하는 시점에 꿈과 희망을 안겨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런 한편 후속 기사를 읽으면서 찬사와 갈채 못지않게 가슴 한 구석에 ‘휑’하는 허탈감을 떨칠 수 없었다.
해당 기업인은 이날 인터뷰에서 작년 2월에 열린 “평창 동계올림픽 때 롱패딩 100만장을 판매했다”고 기염을 토했다. 당시 이 회사 제품이 롯데 백화점에 선보이자마자 구매를 위해 밤샘 줄을 섰던 일화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되는 대목이다. 롱패딩 한 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겉감 3.5야드와 똑같은 양의 안감이 들어가 적어도 이 회사에서만 판매한 롱패딩 제품에 700만 야드의 원단이 소요됐을 것이다. 아쉽고 안타깝게도 이 회사는 전량 중국산 원단으로 충당했을뿐 국산 원단은 한톨도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겉감과 안감 원단은 물론 충전제인 다운과 구스다운도 전량 중국산이고 봉제 또한 미얀마나 인도네시아에서 이루어져 국산은 아무것도 없는 셈이다. 이 회사뿐 아니라 유명 아웃도어 또는 스포츠웨어 브랜드들이 올해도 도합 수백만 장의 롱패딩을 생산 판매했지만 노스페이스를 비롯한 극소수 브랜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중국, 대만산 원단을 사용했다. 롱패딩이 겨울패션의 총아로 등장한 것과는 달리 국산 소재는 전체의 10% 남짓에 불과할 뿐 국산은 이삭만 줍고 알맹이는 중국이 차지했다. 이같은 상황이 결국 한국 섬유산업의 상징이자 견인차였던 62년 역사의 코오롱이 원사 생산을 포기하는 기막힌 상황을 만들었다.
국산 원단 수요가 갈수록 줄어들다 보니 화섬메이커의 원사 생산이 급감한 데다 규모 경쟁을 앞세운 중국산의 무차별 국내시장 잠식으로 국내 화섬 산업이 급격히 쪼그라들고 있다. 대구 산지의 화섬 직물업계도 갈수록 성수기는 사라지고 비수기만 이어지는 고통 속에 땅 꺼지는 한숨을 몰아쉬고 있다. 지금 대구 직물 업계는 그야말로 백척간두 풍전등화 처지에서 악전고투하고 있다. 지난주 대구 소재 에어젯트 30대 규모의 한 임직 전문 제직업체에 전기공급이 끊겼다. 밀린 전기요금을 내지 못해 한전이 끊은 것이다. 원청업체인 풍기소재 중견 某 직물업체가 “전기료를 대신 내줄 테니 공장을 돌리라”고 권유했으나 허사였다. 갈수록 적자가 쌓여 차제에 업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하고 공장문을 닫고 말았다.
이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 이미 공장을 포기했거나 소리 소문 없이 정리한 곳이 수없이 많다. 설상가상으로 산업은행이 대주주이던 르까프 브랜드의 화승이 지난 2월 법정관리에 들어간 후유증이 대구 직물 업계에 엄청난 피해를 야기하고 있다. 심지어 어음 발행 규모가 1300억 원에 달해 이중 상당 부문이 대구 직물 업계에 피해를 안겨준 것으로 나타났다. 시난고난 앓으면서 ‘훅’ 불면 날아갈 기진맥진한 처지에 메가톤급 직격탄을 맞아 포연이 자욱한 상황이다.
거두절미하고 내수 패션 오너들이 국내산업이 더 이상 붕괴되지 않도록 구원투수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지금 상황이 너무 엄혹해 같은 값이면 국산 원단을 사용하는 것이 국내 산업을 살리는 길이고 애국하는 일이다. 물론 중언부언하지만 “외할머니 떡도 싸고 맛있어야 사먹듯” 품질 나쁘고 가격 비싸면 국산 사달라고 요구할 수가 없다. 이제는 품질은 말할 것도 없고 가격도 중국산과 맞출 수 있다. 이미 대구 산지에서는 화섬메이커, 제직, 염색, 사가공업체 각 스트림이 이익 배제하고 중국산과 맞짱 뜨도록 협력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롱패딩과 숏패딩을 포함해 1000만, 2000만 야드 수요량 중 국산으로 몇 백만 야드만 할애해도 대구산지 비감량 직물업체들의 가동률이 확 올라갈 수 있다. 대구 산지가 수출성수기인 봄이 왔는데도 오더기근으로 봄을 못 느끼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을 호소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요즘 그런대로 가동률이 유지된 것은 내수 침장용 원단 수요 때문이다. 중국산 의존도가 90%이상이던 침장용 원단이 지금은 국산대체가 40%에 육박한 것은 서문시장 침장관 전소이후 지역침장업계와 직물업계간의 협력체제 구축 때문이다. 유명 아웃도어 스포츠 브랜드들이 대구 침장업계가 지역 섬유산업을 살리기 위해 가격이 다소 불리한 여건을 감수하고 국산을 사용하는 점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풍전등화 섬유산업 당신이 구원투수

사실 원단 값이 의류 완제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10%에 불과하다. 품질클레임을 인정하지 않는 중국산보다 결제 조건 유리하고 사후 서비스 좋은 국산 소재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싶다.
내수 패션브랜드뿐 아니라 의류 수출벤더들도 가급적 국산 원단 사용을 위해 좀 더 적극적인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지금 이만큼이라도 국내 소재 산업이 남아있으니까 해외 현지 원사 또는 원단 가격이 횡포를 부리지 못하고 있다. 이마저 국내산업이 붕괴되면 가격폭등, 수급조절의 악순환은 받아놓은 밥상이다. 지금은 ‘甲’이 됐지만 의류 벤더들의 오늘의 있기까지 국내 원사·직물업체들의 협력 지원이 지대했음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백척간두에 선 국내 섬유산업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은 의류 벤더만큼 큰 곳이 없다. 순망치한의 정신으로 함께 멀리 가기 위해 의류 벤더, 패션기업 오너들이 직접 챙겨줘야 한다. 토사곽란에 이어 줄초상이 예고된 국내 섬유산업의 중증을 치유하기 위해 의류 벤더와 패션기업인이 선봉장이 돼줄 것을 거듭 호소한다.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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