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잿빛으로 뒤덮인 미세먼지 재앙이 한풀 꺾이자 어김없이 봄의 전령이 성큼 다가왔다. 남녘땅에서 활짝 핀 매화꽃을 신호로 봄의 동의어인 개나리, 벚꽃 잔치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그럼에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계절은 분명 봄이지만 경제는 얼음장이고 산업 현장은 여전히 엄동설한이다.
모든 나무는 뿌리가 다칠 때 가장 아프다. 지난 62년간 이 땅의 빈곤퇴치 주역이고 섬유 대국의 뿌리였던 코오롱그룹의 화섬 사업이 간판 내리고 문을 닫았다. 코오롱그룹의 모태 산업이고 가업인 화섬사 사업을 포기하는 충격적인 사실을 접한 섬유패션인들의 마음은 화석으로 변했다. 장강의 뒷물이 앞 물을 밀어내듯 우리 섬유산업 전반이 쇠락한 것은 사실이지만 섬유산업 버팀목이 이처럼 허망 없이 무너질 줄은 몰랐다.
중언부언하지만 코오롱의 역사는 한국 섬유산업역사이고 산업을 지켜온 대들보였다. 1957년 한국나일론을 시발로 나일론 다후다를 기반으로 대구 직물 산지가 조성됐다.

 

중국산 원단과 가격 경쟁 가능하다.

그 후 69년 폴리에스테르사를 병행했고 효성, 선경 등이 가세해 폴리에스터 직물로 대구가 세계적인 화섬직물 산지로 도약했다. 경기 북부 니트 산업이 아시아의 허브를 표방하며 급성장한 것도 코오롱의 역할이 컸다. 코오롱은 화섬사로 시작해 다각경영의 재벌을 축성했고 우리나라 섬유산업을 선도해온 주역이었다. 화섬산업을 중심으로 한국이 섬유 대국으로 도약하는데 코오롱이 일등 공신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번 코오롱FM의 화섬산업 포기 결정에 충격과 아쉬움을 떨치지 못한 많은 섬유인들의 시각은 두 갈래로 갈리고 있다. 그룹의 모태 산업이자 가업을 포기하는 과정에서 고심참담의 아픔을 감수하며 최고 경영진이 결단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으리라는 수긍론이다. 아무리 그룹의 모태 산업이라고 해도 중국이란 공룡과 싸워 이길 재간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재벌그룹사이지만 10년 전부터 적자를 보며 최근 수년 동안 연간 400억 이상 적자를 감수한다는 것은 감당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룹이 전력투구하고 있는 생명공학이나 바이오산업 같은 신성장 동력에 올인하겠다는 냉정하고 현실적인 분석을 고려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런 한편 코오롱의 화섬산업 포기는 예고된 참사라는 혹평도 비중 있게 거론되고 있다. 만년 라이벌인 효성은 스판덱스 세계 1위로 우뚝 서 이익 규모가 연간 1조 원을 넘는 발 빠른 변신을 한 데 반해 코오롱은 현상 안주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중국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차별화, 기능성 신소재 개발에 올인하기 위해 투자를 강화해야 했음에도 이 부문에서 너무 소홀했다는 지적이다. 실제 구미공장을 김천공장으로 확장 이전할 때 투자가 있었지만 설비투자가 너무 부족했다.
해도사 부문에서 가장 앞서 인조 스웨드 원단사업이 활성화되긴 했지만 이걸로 코오롱FM 전체를 유지 발전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김천공장 내부에 설비가 많이 부족했고 외주생산 비중을 높인 데다 심지어 메이커가 해서는 안 될 수입 원사 판매까지 서슴지 않았다. 근속연수가 장기간인 근로자들의 임금은 최고 연봉 7000만~8000만 원에 달해 베트남의 20배, 중국의 10배 구조 속에 당해낼 재간이 없었을 것이란 동정론도 있다.
문제는 화섬사업에서 손을 떼는 코오롱FM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다른 기업에까지 급속 전이된다는 점이다. 이미 화섬업체 중 대부분이 주종인 폴리에스테르 장섬유 생산을 포기하거나 대거 축소해오고 있다. 기본 관세 8%에 반덤핑관세까지 장벽을 쳐도 중국산과의 경쟁에서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국내 설비는 40년 50년 묵은 구닥다리에 고임금 구조에서 생산성, 품질, 가격경쟁력 모두 형편없이 뒤처져 생태계가 와해되고 있는 것이다.
국내 화섬 산업이 붕괴되면 필연적으로 가격경쟁력뿐 아니라 품질경쟁에서도 부분적으로 앞서있는 중국산에 종속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대구와 경기 북부 니트 산지 모두 중국산 원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중국 메이커들은 피 맛을 본 상어 떼처럼 한국 시장을 공략할 것은 불문가지다. 이렇게 되면 득달같이 지금보다 중국산 화섬사 가격이 20-30% 먼저 오르고 추가 인상 역시 정해진 수순이다. 국내 화섬메이커가 버티고 있으니까 중국 내수가보다 싸게 공급했지만 방어막이 뚫리면 염료처럼 원사시장을 회도리칠 것이 뻔하다.
이같은 절박한 상황에서 애국심이라기보다 시장 논리에 근거해 다시 한번 수요업계에 호소한다. 내수패션브랜드는 물론 중·대형 의류수출벤더들이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자세를 가다듬고 국산 소재 사용에 앞장서줄 것을 요청한다. 국내 화섬, 면방은 물론 직물산업이 더 이상 망가지면 패션브랜드나 의류벤더들도 고통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눈앞의 이익을 내세워 중국산 원사나 원단을 선호하지만 길게 보면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냉험한 시장 논리에서 국산 소재가 다소 비싼 것은 사실이지만 융통성이 있기 마련이다. 비싼 가격에 사달라는 얘기가 아니다. 실무자들이 ‘가격이 비싸다’고 주장해도 오너가 무조건 국산 우선 구매 방침을 밀고 나가면서 값은 수입가격과 동일하게 조정하라고 추달하면 조정이 가능하다. 무조건 ‘국산 소재가 비싸다’는 고정관념으로는 국내 소재산업과 상생할 수 없다.

 

의류벤더 패션기업 오너 기업인이 나서야

희망적인 것은 국내 소재업체들도 이제 막다른 골목에서 안방시장의 실지 회복을 위한 비장한 각오를 다짐하고 있다. 사실 원사값과 제·편직료는 중국과 대동소이하다. 문제는 염색가공료에서 현저한 가격 차이를 보이고 있어 이 부문을 개선하면 경쟁이 가능하다. 실제 지난 6일 대구에서 가진 롱패딩 국산화 촉진회의에서 원사·제직업계는 물론 염색업계도 가격 인하 가능성을 천명했다.
염료수입 수수료만 없애도 7% 원가절감이 가능하고 생산성으로 커버하면 중국과의 맞짱이 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단순한 주판알을 튀기기보다 ‘가동률이 원가’라는 개념에 동의하고 스트림이 똘똘 뭉쳐 원가 경쟁을 펴나가기로 했다. 비상시기에는 비상대책이 있어야 한다.
문제는 패션브랜드 오너의 결단이 중요하다. 실무자에게 맡겨서는 절대 불가능하다. 순망치한의 정신에 입각해 패션브랜드와 의류벤더들이 국산 소재사용을 통한 상생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 이대로 가면 게도 구럭도 다 놓친다. 국내소재산업이 폭망한 후에는 의류벤더와 패션기업이 땅을 치고 후회해도 소용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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