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두절미하고 섬유산업의 생태계가 급속히 와해되고 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폭망 징후가 이토록 허망하게 빨리 올 줄은 미처 몰랐다. 최저임금 과속인상과 근로시간 단축 이전에 이미 경쟁력이 떨어져 도처에 10종 허들과 지뢰밭이 널려있는 점을 모른 바 아니다.
그렇지만 어느 산업보다 내공이 강하고 고래 심줄처럼 생명력이 질긴 우리 섬유산업이 처참히 쑥대밭이 되고 있어 허탈한 탄식을 떨칠 수 없다.
솔직히 지금 우리 섬유산업이 서 있는 현주소는 빙하기에 와있다. 싸고 좋은 경쟁력이 없는 것이다. 과거에는 천수답 경영형태로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계절적인 효과를 많이 누렸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전부터 성수기는 사라지고 4계절 모두 비수기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겨울 꽁꽁 얼어붙었던 화섬 직물과 니트 직물 수출 오더가 3월 초가 돼도 꿈쩍 않고 있다. 대구 화섬직물 산지는 엄동설한이고 경기북부 니트 산지 역시 땅 꺼지는 한숨 소리가 요란하다.

 

국내산업 붕괴되면 당장 20-30% 오른다.

이 판국에 우리 섬유산업을 리드해온 대들보 화섬산업이 중증에 몰려 떡쌀 담그는 참담한 현상이 드러나고 있다. 한국의 섬유산업을 이끌어온 견인차이자 상징기업인 코오롱그룹의 화섬사 메이커인 코오롱FM이 급기야 사실상 종언을 선언한 것이다.
불황에 장사 없다고 연간 400억 원 규모의 적자를 감수하며 회사를 끌고 간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코오롱그룹의 모태 산업이고 가업인 화섬사업을 포기하기로 결심을 굳혔겠는가. 웬만하면 가업을 유지하기 위해 컨설팅에 의뢰해 향후 길을 물었지만 대답은 비관적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한국 섬유산업의 간판이라 할 수 있는 코오롱의 화섬경영이 골병이 들어 시난고난 앓아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중국이란 거대강국의 공세 속에 장강의 뒷물에 앞 물이 밀려나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한 것이다.
이런 비관론으로 인해 신규투자를 않고 구미공장을 김천으로 옮긴 후 공장설비가 많이 비어있었다. 화섬원사를 상당 부문 외주생산으로 돌렸고 심지어 외국에서 원사를 들여와 거래선에 공급하는 등 메이커로서 해서는 안 될 궁여지책을 강구하기까지 했다.
문제는 이같은 극한상황이 섬유산업을 받치고 있는 대들보인 화섬업계에서 코오롱FM뿐이겠는가 하는 것이다. 적어도 주력품목인 폴리에스터필라멘트 부문에서는 대동소이하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최근 수년간 국내 화섬메이커의 영업실적을 봐도 PEF 부문에서는 모조리 적자투성이였다. 그러다보니 메이커마다 이 부문을 줄이고 감산에 감산을 거듭해온 것이다.
원인은 지구촌에 울타리가 사라진 상황에서 중국이란 화섬 강국의 공세 앞에 속수무책이기 때문이다. 국내 화섬업계의 캐퍼를 모두 합쳐도 단섬유·장섬유 포함 연산 120만 톤 미만에 불과하다. 중국의 40분의 1에 불과하다. 중국 화섬메이커의 대표주자인 행리나 생홍의 1개사 캐퍼가 한국 전체 기업보다 많아 규모 경쟁에서 장기판의 차 앞에 졸 신세다. 가연기 부문에서 한국은 전체 가동대수가 300대를 밑도는 데 반해 중국 생홍 1개사 보유 대수가 800대에 육박한다. 그럼에도 생홍의 가연기 보유 대수는 중국에서 ‘빅5’에도 못 들어갈 정도로 상상을 초월한 규모다.
문제는 국내 화섬 교직물과 니트 직물의 버팀목이자 섬유산업 대들보인 화섬산업이 공멸했을 때 득달같이 불거질 타격과 피해다. 지금도 중국산 화섬사가 수입사의 60%를 차지하고 있지만 현재 들어온 가격은 자국 판매가보다 10-20% 싸게 공급하고 있다. 만약 국내 화섬산업이 붕괴돼 중국 의존도가 절대적일 경우 그들은 당장 정상가로 환원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최소 현재 공급가보다 20-30% 이상 올리는 것은 불문가지다.
그나마 시난고난하는 한국 화섬메이커가 존재하니까 중국 화섬업체들이 싼 가격에 공급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독무대가 됐을 때 눈치 볼 것 없이 체면불구하고 마음대로 가격 횡포를 부릴 것은 기정사실이다. 160년 전 세계 최초로 화학 염료를 개발해 시장을 지배해오던 독일이 중국에 생산기지를 넘겨준 후 염료가격이 폭등하고 수급 불안을 일으킨 현상이 하나의 예증이다. 국내 섬유업계가 파운드당 몇 센트 싼 맛에 중국이나 대만·베트남산 원사를 선호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더구나 한국의 화섬업계를 붕괴시키기 위한 나비의 날갯짓은 이미 시작됐다. ‘행리’나 ‘생홍’같은 중국 내 양대 화섬메이커는 뒷전에 있었지만 중간급 화섬업체들의 시장교란 행태는 앞으로 한국 시장을 어떻게 장악할 것인가에 대한 포석임이 드러났다. 작년 11월 중국 업체들이 폴리에스테르사의 대한 공급가격을 파운드당 무려 200원씩 내려 대량 계약한 사례다. 당시 국내 화섬직물과 니트 직물 업체들이 ‘횡재다’ 싶어 대량 계약했다.
이 여파로 감산에 감산을 거듭해도 재고가 늘어나던 국내 화섬메이커가 실이 안 팔려 곤혹을 치렀다. 올 1, 2월까지 딜리버리 조건이어서 지금까지 당시 계약한 실이 무더기로 들어오고 있다. 한국 시장을 교란시켜 화섬업체의 숨통을 조이겠다는 전략의 일환이 아닌가 싶다. 중간급 기업들의 농간이 이 정도 한국 메이커에 타격을 안겨줬는데 만약 ‘행리’나 ‘생홍’같은 대형 메이커가 가격을 후려치면 국내 메이커가 백기 투항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중국 독무대 염료처럼 가격폭등 불 보듯.

지금 이 순간 국내 섬유산업이 화섬사 부문에서 중국의 속국이 되느냐 마느냐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을 맞고 있다. 물론 글로벌 시대에 ‘외할머니 떡도 싸고 맛있어야 사 먹는다’는 개념을 외면할 수는 없다. 그러나 눈앞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파운드당 몇 센트 싼 맛에 수입사를 선호하면 국내산업의 붕괴는 시간문제이고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한 푼이 아까운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원가절감의 중요성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길게 보고 국내 메이커와 상생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이것은 비단 화섬사뿐 아니다. 면방도 매한가지다. 국내 수요자들이 파운드당 몇 푼 싸다고 수입사에 의존하면 원사 메이커의 붕괴를 앞당길 수밖에 없다. 반면 화섬메이커들도 과감한 설비투자와 기술개발로 중국이 못 만들거나 안 만드는 원사를 개발해야 한다. 40년-50년 된 구닥다리 설비로 버티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 임을 직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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