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가 좋았다. 32년 전인 지난 87년 11월 11일 단일품목 최초로 섬유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해 섬유의 날이 제정됐다. 반도체, 전자, 철강, 화학 등 기라성 같은 타 업종의 질투가 쏟아졌지만 섬유는 난공불락의 위세를 과시했다. 그 후 우리 업계는 산이 높으면 계곡이 깊다는 것을 망각하고 추락하는 일본만 눈에 보일 뿐 중국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강산이 세 번 바뀌는 동안 장강의 뒷물이 앞물을 밀어내며 전성기 한국 섬유산업에 해가 졌다. 쇠락의 징검다리를 건너버린 한국 섬유산업은 시난고난 중증환자로 변했다. 지난 2000년 섬유 수출 187억 8000만 달러를 정점으로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오면서 올해도 작년 수준과 비슷한 138억 달러를 턱걸이할 것 같다. 산업 현장은 갈수록 거미줄과 곰팡이가 가득 차고 있다.
광에서 인심 나듯 여유가 있고 앞날이 보여야 사람이 모이고 웃음 띤 모습을 기대할 수 있다. 섬유패션인의 통합감과 희망으로 가득 찬 축제의 한마당이 돼야할 올해 섬유의 날 기념식이 웃음보다 수심이 가득한 이유도 무리가 아니다.
지난 20년 언제라고 편한 날 있었나
지난 20년간 국내 섬유산업은 꾸준히 축소지향 일변도였다. 국내에서는 간판 내리고 문 닫는 돌림병이 창궐한 반면 너도나도 해외로 엑소더스가 대세였다. 한국수출입은행 집계에 따르면 국내 섬유패션기업의 해외투자는 무려 5,855개(2017년 말 기준)에 달한다. 투자 규모도 89억 9600만 달러에 달한다. 해외공장에는 수천, 수만 명을 고용한 데 반해 국내 섬유공장 4만여 개 중 300명 이상 기업은 불과 5개사에 불과하다. 100명 이상 기업도 102개사에 불과하다. 종사자 1명 이상 50인 이하가 전체의 98%에 달한다. 중국보다 5~6배, 베트남· 인도네시아보다 10배나 높은 임금구조 속에 전체 기업의 10%만 이익을 내고 나머지는 잘하면 현상 유지에 대다수 적자 신세다.
양지가 음지 되고 음지가 양지 되는 세상의 이치를 믿을 수도 없다. 한 달 크면 한 달 작듯 불황이 지나면 호황을 기대할 수 있으나 돌아가는 통박은 경기 순환 차원이 아니다. 구조적인 불황에 공황으로 가는 노루목을 지나가고 있다. 더구나 내년 경제 사정은 올해보다 더욱 혹독할 것이란 예고가 여기저기서 나돈다. 국책기관인 KDI는 내년 우리 경제성장률을 한국은행보다 더 낮춘 2.6%로 예고했다. 소비· 투자· 고용 모든 것이 곤두박질치고 있다.
우리 내부뿐 아니다. 글로벌 경제가 동반 하향세로 접어들 것이란 불안한 전망에 힘이 실리고 있다. 호황을 이어온 미국경기는 지금이 고점이라는 지적이 늘고 있다. 상원은 지켰지만 하원을 내준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추진에도 제동이 걸릴 가능성이 크다. 중국의 성장세는 빠르게 둔화되고 있고 유럽 경기는 이미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최저임금 갈등과 근로시간 단축으로 빚어진 경제계의 타격과 갈등은 여전히 넓고 거칠게 확산되고 있다. 가당치 않은 반기업 정서로 기업 의욕이 상실되고 있다. 기고만장한 촛불세력의 강경투쟁에 기업의 투자 의욕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도처에 인화 물질이 널려있어 웬만한 기업은 파산의 불길이 언제 어디서 발화할지 숨을 죽이고 있다.
그러나 짧게는 지난 20년 우리 섬유산업이 언제라고 마음 편히 태평성세를 누린 날이 있었는가. 산이 막히면 전력투구해 넘었고 물이 가로막으면 돌아가는 지혜로 위기를 극복했다. 불길이 꺼져가긴 했어도 불씨마저 사그라진 것은 아니다. 분초를 다투는 변곡점을 맞아 양에서 질 경영으로 발 빠르게 전환하면 길은 있기 마련이다.
몸체 큰 동물은 행동이 굼뜰 수밖에 없다. 대량 경쟁으로는 중국 앞에 장기판의 졸 처지이지만 틈새시장 공략은 한국만큼 순발력 강한 국가가 없다. 바로 차별화· 숏딜리버리 전략이 대안이다.
올해 섬유의 날에 영예의 금탑산업훈장을 수훈한 최영주 (주)팬코 회장의 경영철학이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최 회장은 지난 34년 창업 역사 속에 남들이 잘하는 분야보다는 팬코만이 잘할 수 있는 분야에 선택과 집중했다. 도저히 경쟁사가 따라 올 수 없는 초 단납기 체제를 구축했다. 시장도 까다롭고 힘든 일본 시장에 집중해 올해 2억 8000만 달러, 2020년 5억 달러 수출 고지를 겨냥하고 있다.
물론 미국 시장보다 훨씬 어려운 일본 시장에 올인 하는 길은 험로 그자 체였다. 품질과 납기, 차별화 소재개발, 사후관리 모든 게 완벽하지 않으면 통하지 않는 시장이다. 만 75세의 최영주 회장의 머리숱이 줄어든 이유를 알만하다. 이젠 누구도 사즉생(死則生) 각오로 마부위침(磨斧爲針)의 정성을 쏟아 붓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지난 70년 말 재벌랭킹 15위 총수로서 섬산련 회장과 전경련 부회장을 역임한 장치혁 회장은 IMF란 모진 풍파로 자식처럼 아끼던 울산 KP케미칼을 뺏겼다. 그는 불황 때 대규모 투자를 감행해 세계 일류 석유화학과 화섬 원사공장을 완공했다. 그 회사가 롯데케미칼로 바뀌어 지난해 순이익만 2조 3000억 원에 달했다. 처음 주변에서 걱정하는 소리가 많았지만 어떤 불황에도 10개 중 한두 곳은 호황을 누릴 수 있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아 세계 초일류기업으로 만든 것이다.
분명히 말해 섬유산업은 과거의 산업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도 적색경보가 발령돼 많은 기업들이 오더 가뭄으로 파리 날리는 것과 달리 풀가동하며 표정 관리 하는 기업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바로 소재 개발하고 설비투자하면서 부단히 틈새시장을 공략한 기업들이다. 남이 개발한 제품이나 모방하며 기약 없는 성수기를 기다리는 천수답경영으로는 살아남지 못한다.
차별화 승부사 팬코의 전략 배우자
우리 섬유 기업들이 좌절하지 않고 투자하며 기술개발에 올인 하면 길은 얼마든지 있다. 최근 오더 기근으로 빈사 상태인 대구지역 환편 니트 직물업계에 150만 야드의 오더 폭탄이 떨어진 것도 그만큼 차별화와 가격 경쟁력에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도 어제의 중국이 아니다. 기술과 마케팅 규모 경쟁은 앞섰지만 인건비 상승이 만만치 않다. 생산비의 10%는 환경 부담감을 각오해야 한다. 우리가 차별화 전략으로 맞짱 뜨면 승산이 있다. 궁지에 몰린 나폴레옹은 “나에겐 아직도 비장의 무기가 있다. 그것은 희망이다”고 용기를 부추겨 승리했다.
반가우면서도 우울한 올해 섬유의 날을 보내면서 다시 한번 당부한다. 간당간당 남아있는 섬유산업을 살리기 위해 벤더와 패션기업, 소재 업체가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정신을 바탕으로 상생의 전략을 강구해주길 거듭 강조한다. 특히 허리 부문인 직물산업마저 무너지면 섬유산업은 게도 구럭도 다 놓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어렵겠지만 내년 섬유의 날에는 웃음꽃이 피었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