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풍낙엽(秋風落葉)은 계절이 몰고 온 자연의 섭리지만 그 의미는 처연(悽然)하다. 계절과 무관하게 경쟁력을 잃고 시난고난하는 섬유패션기업들이 가을바람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최근 70년 넘게 명맥을 이어온 최장수 의류기업 독립문이 팔린 것도 같은 맥락이다. 부도나지 않고 새 주인을 만나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럽게 여겨야 한다.
역사와 전통이 밥 먹여 주는 것이 아니다. 분초를 다투는 변화에 둔감하면 망망대해 편주 신세에서 결국 침몰할 수밖에 없다. 이 땅의 빈곤퇴치 주역이자 경제발전 견인차였던 수많은 섬유 기업들이 안주하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억 8000만 년 전 지구를 지배하던 공룡이 멸종된 것 역시 자연의 변화를 거부하다 당한 참사와 같다.
지난 70년 대한민국이 걸어온 도전과 성취의 과정인 한강의 기적을 이룬 일등공신 섬유 기업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참사가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의류 수출의 간판이었던 삼도물산, 협진양행, 쌍미섬유, 한창섬유, 서광을 비롯한 기라성 같은 의류 수출기업들이 사라졌다. 동국무역과 갑을, 남선방직, 한국합섬, 금강화섬, 대하합섬 등 대구 직물업계 대표기업도 사실상 소멸됐다.

 

‘甲’이 된 의류벤더 ‘역지사지’ 생각해야

장강의 뒷물이 앞 물을 밀어내는 것은 자연 순리다. 진공상태서 빛의 속도는 일정하지만 글로벌 기업 환경의 변화의 속도 또한 빛의 속도 못지않다. 한국섬유업계의 큰손이었던 미국의 대형 유통업체 시어스가 무너진 것도 온라인으로 급변하는 유통산업변화에 둔감했기 때문이다. 시어스뿐 아니라 유통구조변화에 발 빠른 변화를 못 한 기업은 올해만도 미국에서 수천 개가 문을 닫고 있다.
반면 많은 우리 섬유패션기업이 경쟁력을 잃고 중증상태에 신음하고 있지만 지금도 잘 나가는 기업은 주변에 얼마든지 있다. 남보다 한발자국은 물론 반발자국만 앞서 치고 나가는 기업은 불황을 모른다. 그 대전제는 중언부언 강조해도 투자다. 대패질 않고 매끈한 나무를 기대할 수 없듯 생산성· 품질· 기술력 선행 없이 호황을 바라는 것은 도둑 심보다. 일본경영계의 신(神)으로 추앙받던 마쓰시타전기 창업주 마쓰시타 회장의 명언처럼 불황 때 투자하는 것이다.
냉엄한 각자도생 시대에서 스스로 살길을 찾는 사즉생(死則生) 의지가 없으면 조난될 수밖에 없다. 중국과 똑같은 제품으로 대응하는 것은 ‘호랑이 앞에서 웃통 벗는 격’이다. 규모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면 그들이 못하는 제품, 쉽게 따라 올 수 없는 제품으로 승부하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찾으면 얼마든지 있다. 기업 자체는 물론 그 많은 단체나 연구소들이 이점을 중시하고 이 잡듯 뒤져야 함에도 ‘못하는 건지’ ‘안하는 건지’ 당최 알 수가 없다.
또 하나 절실하고 간곡하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주식회사 한국 섬유산업’에 입각한 스트림간 상생 정신이다. 시대적 상황과 시장원리에 따라 이른바 ‘甲’과 ‘乙’이 바뀌었지만 대한민국 섬유패션산업은 함께 멀리 가야 한다는 최소한의 동반자 의식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지난 2010년으로 기억된다. 수년간 죽을 쓰던 면방경기가 폭발적으로 상승해 코마사 가격이 고리당 800달러를 상회할 때가 있었다. 국제 원면값이 미쳐 날뛰는 바람에 면방업계가 부르는 게 값이고 배급 주던 시절이 있었다. 면사값이 하루가 다르게 천정부지로 치솟아 싼값에 확보한 원면을 투입해 면방업계가 떼돈을 벌었다.
그 당시 국내 최대 면방업체인 일신방의 김영호 회장이 임원회의 때 영업담당 임원에게 다음과 같이 질책한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면사값이 수직상승하면 당장 수익이 높아 좋겠지만 거꾸로 내려갈 때도 생각해야 돼. 이렇게 값을 올리면 거래선인 수요업계가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가격 인상을 억제하고 수요업계와 상생토록 하게.”
영업 파트에서는 “메뚜기도 한때다 싶어” 신나게 값을 올리던 시점에 김 회장의 한마디에 천정부지 면사값을 자제했던 일화가 있다. 사실 섬유산업의 뿌리인 면방산업은 반세기 가까이 ‘甲’의 입장에서 영업을 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세상이 바뀌었다. ‘乙’의 약자적 입장에 있던 의류수출벤더가 ‘甲’으로 변해 거꾸로 면방업계가 “우리 실 좀 사달라”고 매달리는 형국이다. 벤더들이 “면사· 화섬사 제때에 제대로 공급해 달라”고 통사정하던 입장에서 “세계는 넓고 살 곳은 많다”로 바뀐 것이다. 더구나 해외에 매머드 소싱 공장을 가동하고 있는 의류벤더들은 원자재 구매 역시 현지화를 빠른 속도로 구축했다. 더구나 한국에 비해 원자재 구매조건도 가격에서부터 유리해진 점을 활용하고 있다.
이같이 원자재 현지조달이 급증하면서 국내 면방업체와 직물업체들이 치열한 가격경쟁을 의식해 베트남 등지로 탈출했다. 한국에서 공급가격과 베트남에서 공급가격 차도 없다. 의류벤더들의 초이스는 갈수록 넓어져 골라서 선택한다. 아무래도 한국산보다 현지 조달 가격이 한 푼이라도 유리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양지가 음지 되고 음지가 양지 되듯 원자재 수급조건도 변화무쌍할 수 있다. 무엇보다 한국의 사류와 원단업체들이 지금 이만큼이라도 버티고 있으니까 중국과 인도 베트남 원자재업체들이 가격 질서를 지키고 있다. 만약 한국의 원사나 원단업체가 죽고 없으면 중국, 베트남, 인도 업체들은 ‘부르는 게 값’이 될 수 있다.

 

국내 산업 붕괴되면 원자재 파동 온다

그래서 거듭 강조되고 있는 것이 섬유 스트림간의 상생 정신이다. 의류벤더들도 바이어의 가격 후려치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중국이나 대만처럼 같은 값이거나 설사 한 두 푼 더 비싸도 결정적인 손실요인이 아니라면 국산 소재를 사용하는 아량을 베풀어야 한다. 어려울 때 같이 돕는 것이 진정한 동반자의식이다.
지금 이 순간 면방업체마다 재고가 수백만 kg씩 체화돼 수백억 원씩 현금이 잠겨있다고 한다. 이럴 때 벤더들이 기왕 사야 할 면사라면 적정가격에 대량 구매하는 아량을 베풀어야 한다. 원사와 직물을 비싼 값 불리한 조건에 사달라는 얘기가 아니다. 같은 값이면 국산 소재를 사용하는 아량을 보였으면 싶다.
거듭 강조하지만 ‘甲’이 된 의류벤더가 심하게 흔들리는 국내 소재 산업을 안정시키도록 평형수(平衡水) 역할을 위해 앞장서야 한다. 그것도 아랫사람들에게 미루지 말고 오너 회장이 직접 팔소매를 걷어 올려야 한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정신을 발휘해주길 거듭 강조한다.

 

저작권자 © 국제섬유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