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0년 대한민국이 걸어온 도전과 성취의 과정을 흔히 한강의 기적이라고 표현한다. 자원도 자본도 기술도 없는 최빈민국이 “할 수 있다”는 국민적 신념을 통해 세계에서 유례없는 압축성장을 이뤄냈다. 그 도정에 어느 한순간도 맘 편할 수 없던 간난(艱難)과 신고(辛苦)의 치열한 여정이었다. 불과 24년 전인 1994년까지 북한 경제보다 뒤졌던 대한민국이 북한의 40배 경제 규모에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을 실현한 쾌거에 전 세계가 찬사와 갈채를 보내고 있다.
아쉽고 안타까운 것은 문재인 정부의 국정지표인 소득주도성장 정책이 몰고 온 시행착오의 모순이 너무 거칠고 깊게 번지고 있다는 점이다. 장하성 정책실장의 거침없는 강변에도 불구하고 시장이 심하게 출렁이고 있어 이를 바로잡을 평형수(平衡水)가 발등의 불이다. 경제학 이론에도 없는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취지가 아무리 좋아도 시장에서 거부반응을 일으켜 성장도 고용도 멈추고 말았다. 고용 창출의 주인공이 기업이란 사실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데 세금으로 고용을 늘리겠다는 발상은 자칫 발묘조장(拔苗助長)의 우를 범할까 걱정이다.

 

산업부 장관, 섬산련 회장과 소통해야

송나라의 한 어리석은 농부가 곡식을 심은 뒤 밭에 나가보니 다른 사람의 묘목보다 덜 자란 걸 보고 모든 싹을 조금씩 위로 당겨 줬더니 시름시름 다 죽었다는 뜻이다. 너무 서두르다 역효과를 본다는 이 말은 맹자의 공손추(公孫丑) 편에 나온 말이다.
물론 일을 하다 보면 손도 베고 접시도 깰 수 있다. 이미 전 정권에서부터 망가지기 시작한 경제구조에서 소득주도성장 정책이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릴 수 있다. 하지만 경제는 이념과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시장이란 현실에 막히면 최저임금을 업종별· 지역별로 차등 적용하면서 속도 조절을 하고 돌아갈 줄도 알아야 한다.
더구나 개인 사업장뿐 아니라 내국인이 오지 않아 산업현장에 외국인 근로자 의존율이 높은 처지에서 최저임금을 내국인과 똑같이 적용하는 모순을 하루빨리 시정해야 한다.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도 주별로 최저임금이 각기 다르다. 멕시코에 인접해있는 텍사스주에서 멕시칸들이 대거 일하고 있지만 영주권자와 불법체류자의 최저임금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영주권이 있는 멕시칸들은 시간당 6.70달러를 지급받는다. 하지만 영주권이 없는 멕시칸은 하루 온종일 일하고 고작 60달러를 받는다.
L·A에서도 최저임금은 시간당 10.5달러로 주별로 격차가 크다. 우리나라처럼 합법· 불법 가리지 않고 최저임금을 적용해 연장수당까지 월 420만원을 지불하는 나라는 지구촌에서 보기 힘들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과 도서벽지 임금이 똑같다는 것은 소가 웃을 일이다.
문재인 정부의 아킬레스건인 성장과 고용을 늘리는 길은 멀리 있지 않다고 본다. 정부가 기울어진 운동장의 반기업 친노동 정책에서 친기업 정책이 고용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면 된다. 의심나면 경제가 아주 잘나가는 남의 나라 성공사례를 벤치마킹하면 된다. 미국과 일본· 프랑스· 독일· 인도의 일자리 호황 국가에서 배우면 된다.
경제성장을 통해 일자리를 늘리는 이들 국가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강성노조와의 전쟁을 선포한 결과다. 프랑스의 젊은 지도자 마크롱 대통령은 지지도 30%를 감수하며 강성노조와 피바다를 각오하고 친기업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무너져 내리던 프랑스 경제가 급상승하고 있다. 미국 트럼프, 일본 아베, 독일 메르켈, 인도 모디 정부 모두 실업률이 30년 만에 최저수준으로 떨어진 비결은 친기업 정책이다. 성을 쌓는 데는 10년이 걸리지만 무너지는 것은 금방이다. 노동자도 기업인도 모두 우리 국민이다. 모두 보듬고 가되 어느 쪽 주장이 더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인지 분간해야 한다. 촛불의 성공은 과격한 진보주의자뿐 아니라 합리적인 보수층의 동참에서 비롯됐다. 기울어진 노동정책은 산업현장의 공멸로 가는 지름길이다.
때마침 8.29 중폭개각이 이루어졌다. 2기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위해 성장과 쇄신에 방점을 둔 인사로 받아들여진다. 우리 업계가 더욱 관심을 갖고 있는 정부의 산업정책수장도 바뀌었다. 정통 경제관료 출신인 성윤모 장관은 중소· 중견기업 업무와 연구개발(R&D) 분야에 해박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민간주도 시대에 장관이 바뀐다고 산업정책이 180도 뒤집기는 어렵지만 주무장관의 의지와 전문성에 따라 산업 판도가 달라진다. 과거 3공 시절 이낙선 상공부 장관의 성급한 섬유사양론이 알려진 후 잘 나가던 국가 주력산업인 섬유산업이 심한 홍역을 치렀다. 은행은 섬유산업에 신규대출을 기피하고 기존 대출금 회수에 열을 올렸다. 많은 섬유기업인이 생판 모른 전자업종에 뛰어들었다 혼쭐이 났다.
1년 2개월 남짓 재임한 백운규 산업부 장관 시절 국내 섬유패션산업은 빙하기를 맞았다. 이미 경쟁력을 잃어 시난고난한 상황에서 가장 민감한 최저임금이 대폭 올라 섬유산업 현장에 아비규환이 됐다. 노송(老松)이 무덤을 지키듯 30만 명이 고용되고 있는 섬유패션산업 육성정책은 사실상 실종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교수 출신인 백 전 장관은 섬유패션에 대한 전문성은 고사하고 별다른 관심도 보이지 않은 것 같았다. 백 장관은 “섬유산업 하면 봉제가 전부인 것으로 알고 있다”는 한 산업부 관리의 독백처럼 스트림별 산업의 특성을 몰랐다. 여기에 업계와의 소통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장관 취임 초 최저임금 파동으로 ‘면방업체의 해외 탈출 봇물’ 기사가 터져 나오자 긴급간담회를 간진 것 말고는 이렇다 할 장관 주재 회의도 드물었다.

 

빙하기 섬유패션산업 중흥정책 시급

산업정책을 총괄하는 산업부 장관은 적어도 섬유산업연합회장과는 잦은 회동을 갖고 업계 현안을 청취해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 하나의 예증으로 백 장관 재임 시 섬유산업연합회가 이사회와 총회에서 의결한 야심 찬 글로벌 섬유센터 건립 승인을 단칼에 잘라버린 우를 범했다. 아무리 국·과장이 상황을 잘못 인식하고 불가 방침을 건의해도 최종 결정자인 장관이 섬산련 회장과 한 번쯤 독대를 하고 최종판단을 했어야 했다. 민간단체인 사단법인의 총회, 이사회 결의사항을 주무 부처가 싹둑 자르는 행정 행위는 두고두고 논란이 될 수밖에 없다. 당연히 승인될 것으로 믿고 추진됐던 글로벌섬유센터 승인 거부로 섬산련은 엄청난 임대료 손실과 공사에 따른 수천 명의 일자리 창출 기회를 상실하고 말았다. 예외는 있지만 실물을 모르는 교수들이 훈수는 잘하지만 책임을 지지 않는 타성이 있다.
다행히 산업정책과 중소· 중견기업 정책에 해박한 성 장관 취임을 계기로 실종되다시피 한 섬유패션 정책이 부활가(復活歌)를 부를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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