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섬유 수출 대국이 되기까지 이면에는 바잉오피스의 공로를 부인할 수 없다. 80년대부터 기라성 같은 미국 및 유럽 백화점과 체인 스토아들이 한국산 섬유 제품을 더 많이 구매하기 위해 앞 다퉈 서울에 대형 사무실을 개설했다. 지금은 대부분 70대가 되어 일선에서 후퇴했지만 유능한 바잉 오피스 지점장들이 한 톨이라도 더 많이 한국산을 구매하기 위해 총력전을 전개했다.
월마트와 타겟, 갭, J·C 페니, 시어스, 메이시 백화점을 비롯한 대형 유통업체들이 작게는 연간 5~6억 달러에서 10억 달러 이상 한국산 의류를 구매하는데 핵심 역할을 했다.
일부 견해가 다를 수 있지만 대다수 바잉오피스 지점장들은 30년 또는 반세기 가까이 재임하며 때로는 본사를 설득하고 대립각을 세우면서 한국산 구매에 전력투구했다. 한국 섬유 수출의 전성기를 견인한 바잉오피스 지점장들의 공로를 잊을 수 없다. 정부가 매년 무역의 날을 성대히 거행하면서 이들 공신들을 제대로 포상하지 못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떨칠 수 없다. 이들 바잉오피스의 지원과 협력이 없었다면 세계 의류 공급의 핵심이 된 국내 의류벤더의 오늘도 기약할 수 없었다.

 

난파선 예견한 바잉오피스 탈출

그러나 장강의 뒷물이 앞 물을 밀어내듯 중국과 베트남 등 후발국에 밀려 우리나라 생산기지가 공동화되면서 바잉오피스의 전성기도 해가 저물었다. 이미 월마트와 갭, 시어스를 비롯한 대다수 바잉오피스가 홍콩과 상해로 떠난 데 이어 타겟까지 지난달 한국 사무소를 폐쇄했다. 나머지 몇 개 남은 바잉오피스도 언제 문을 닫고 떠날지 기약할 수 없다. 생산기지가 없는 한국에서 비싼 비용을 부담하며 존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배가 침몰 위기에 몰리면 쥐가 먼저 빠져나가듯 한국 섬유산업의 침몰을 예견하고 이들이 먼저 빠져나가고 있다. 주식회사 한국섬유산업호가 난파되는 것을 그들이 먼저 꿰뚫고 나간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떠나는 신호탄을 보고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 위기감과 대응책을 외면하는 우리의 현주소가 한심하다. 중증에 몰린 한국 섬유산업이 회생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고도 환부를 도려내는 집도의가 없다.
솔직히 지금 우리 섬유산업이 화염에 싸였다. 파산의 불길이 언제 어디서 발화할 것인지 숨을 죽이고 있다. 돌아가는 통박을 보면 화마가 난무하는 극한의 위험지대로 향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망하지 않은게 기적이다.
임금은 베트남의 10배에 달한 반면 생산현장에 사람이 없다. 돈보다 더 급한 것이 사람인 섬유산업현장에 하루가 다르게 곰팡이와 거미줄이 쌓인다. 설비는 중국과 베트남보다 구닥다리여서 생산성과 품질경쟁이 어려워졌다. 울타리가 없어진 글로벌 경쟁에서 가격과 품질 경쟁력이 떨어진 한국산을 누가 사주겠는가.
설상가상 폭풍이 몰아친 망망대해에서 편주 신세가 된 우리 섬유산업을 불구덩이 속으로 몰아넣는 악재가 또 덮치고 있다. 최저임금 인상의 후폭풍이 몰아치고 있는 상황에서 내년도 최저임금인상이 기다리고 있다. 아직 예단할 수 없지만 노동계의 인상 요청 안이 어안이 벙벙한 수준이다. 노동계의 내년 임금인상요구는 올해보다 무려 43%나 올린 시급 1만 790원을 들고 나왔다. 작년보다 16.4%를 올린 올해 최저임금 인상으로도 사느니 죽느니 하는 판국에 두 배 이상 더 요구하고 있다.
물론 사용자 측이 동결을 주장하고 업종별 차등적용할 시 융통성을 두겠다고 하지만 많건 작건 올해보다 오르는 것은 불문가지다. 노동계가 아무리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를 내세운다고 해도 올해보다 43%를 더 올리겠다는 것은 상식도 진실도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다. 가뜩이나 시난 고단하며 ‘훅’ 불면 날아갈 처지인 섬유산업 등 중소 제조업을 공멸로 몰고 가는 처사다. 기업이 살아야 고용이 유지되고 임금을 받지 간판 내리고 문 닫으면 꿩도 매도 다 놓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중언부언 하지만 해외로 탈출했거나 자연사한 기업 외에 남아있는 국내 기업이 더 이상 몰사하지 않고 생존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이대로 가면 5년이 한계 수명이다. 최저임금은 뛰고 주 52시간 근로시간 단축에 사람은 없고 산업용 전기료까지 들먹거린다. 아직도 1인 이상 섬유기업이 4만 개가 국내에 포진해 있는 사실을 직시하면 공멸 위기에 온몸이 스멀거린다.
답답하고 분통이 터진 것은 섬유산업 대들보가 무너지고 있는데도 뚜렷한 처방이 없다는 것이다. 정부의 산업정책은 실종되고 그 많은 섬유 패션단체들은 업계를 살리는 노력보다 제 살길 찾기에 급급하고 있다. 섬유산업연합회를 비롯한 중앙과 지방의 주요 단체와 연구소가 64개에 달하지만 극소수를 제외하고 자생력이 없다.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 듯’ 그동안 정부가 지원하는 예산에 안주하다 세상이 바뀌면서 이마저 대폭 줄어들기 때문이다.
업계가 어려우면 단체도 달라져야 한다. 단순한 회원사의 친목 도모나 가치 없는 정보 교류보다 해당 산업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치열하게 연구 조사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종갓집인 섬유산업연합회부터 섬유패션산업의 싱크탱크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야 한다. 지금처럼 벼랑 끝에 몰린 섬유패션산업의 활로를 찾기 위해서는 섬산련의 역할이 어느 때 보다 강조될 수밖에 없다. 섬산련뿐 아니다. 업종별 단체와 연구소가 팔소매를 걷어 올리고 분골쇄신 노력해 업계를 리드해야한다. 정부와 업계· 단체가 사즉생(死卽生) 각오로 총력전을 전개하면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남은 4만 개 섬유 기업 공멸 안 된다

때마침 미국과 중국과의 무역전쟁은 우리 섬유산업에 호기가 될 수 있다. 이미 미국의 대형 온· 오프라인 바이어들은 중국에서의 소싱과 거래를 동남아로 전환하고 있다. 이럴 때 한국의 섬유산업이 제대로 가동하면 엄청난 반사이익을 거둘 수도 있다. 더구나 2012년부터 발효된 한· 미 FTA의 단계적 관세철폐로 관세가 많이 낮아졌으며 이마저 2021년이면 끝난다. 이렇게 되면 한국산 섬유는 무관세 혜택을 받고 중국산은 16~32%의 관세를 부담하게 된다.
미국 바이어와 소비자들로부터 중국산에 비해 훨씬 높은 인지도와 친밀도를 갖고 있는 한국산 섬유 제품의 가능성은 커질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남아있는 국내 섬유산업을 더 이상 소멸시키지 말고 유지발전 시키는데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정부도 죽건 살건 각자도생에 맡기지 말고 더 이상 망가지기 전에 효과적이고 적극적인 지원육성책을 마련해야 한다. 업계 스스로 설비, 기술, 마케팅투자에 가용재원을 총동원해야 한다. 관련 단체들도 환골탈태해 업계의 구심점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한다. 엄혹한 이 시기에도 정신 못 차리면 게도 구럭도 다 놓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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