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강산이 4번 바뀌는 세월 경제 기자로 산업현장을 누비고 있는 필자가 쓴 ‘조영일 칼럼’이 200자 원고지 3만 장분에 달한다. 전성기 해가 저무는 위기의 섬유산업을 살리기 위해 소명의식 하나로 밤낮 거르지 않고 매주 칼럼을 써 왔다. 소설가 박경리 원작 대하소설 ‘토지’의 전 21권의 방대한 원고 분량과 버금가는 규모다. 요즘은 세월 탓인지 글 쓰는 열정이 식어가고 보람을 못 느껴 글에 매가리가 빠진 느낌이다. 박식하지는 못하지만 나름대로 국내외를 누비면서 눈동냥, 귀동냥을 동원해 섬유산업이 어디로 가야 한다는 대전제를 제시하느라 안간힘을 써왔다. 하지만 정부나 단체는 마이동풍(馬耳東風), 쇠귀에 경 읽기이고 산업은 쪼그라들어 좌절과 무력감을 떨칠 수 없다.
그럼에도 섬유패션산업을 살리기 위해 정론직필(正論直筆) 정신을 꺾을 수 없어 입에 쓰지만 산업생태계에 좋은 고언(苦言)을 포기할 수 없다. 요즘 돌아가는 통박을 보면 “선무당 사람 잡고 반풍수 집안 망한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 하나의 예증으로 소통 잘한 문재인 정부에서 뜬금없는 소득주도형 경제성장을 들고나온 후유증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정부· 단체· 연구소 손 놓고 있다

섬유를 비롯한 중소기업종과 자영업자를 불구덩이 속으로 몰아넣는 최저임금인상부터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 통계는 거짓말을 못 한다. 지난해 정부가 25조 원에 달하는 나랏돈을 일자리 정책에 쏟아부었음에도 사상 최악의 고용절벽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실업자 수는 현재 방식의 통계 작성을 시작한 2000년 이후 가장 많은 126만 명에 육박한 것으로 나타났다. 1년 새 오히려 12만 명 늘어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줄여도 시원찮은 공무원 수를 늘리고 정부 재정으로 중소기업 임금을 지원한들 한강에 돌 던지기다. 일자리 만드는 주체는 기업이란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인데 정부 정책이 갈지(之)자를 걷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기업이 망하면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바로 최저임금을 한꺼번에 16.4%나 대폭 올린 것이 중소기업을 사지(死地)로 몰아넣은 것이다.
지불 능력만 있으면 최저임금 올리고 근로시간 단축하여 저녁이 있는 삶을 영위하는 걸 반대할 사람이 없다. 그러나 대다수 중소기업 임금 근로자는 아직도 자녀들 학원비 조달을 위해 더 벌어야 되고 그래서 ‘저녁이 있는 삶’보다 ‘저녁거리’가 걱정인 것이 현실이다. 근로자의 소득 증대를 위한다고 덥석 최저임금부터 올려놓다 보니 기업은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사람 줄이는 것이 발등의 불이 되고 말았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도 아파트 경비원 월급 올려주다 무인 경보시스템으로 바꿔 우수수 감원 선풍이 분 선례를 똑똑히 기억하면서 흉보고 닮아가는 꼴이다.
한마디로 경영현장을 모르는 백년 서생들이 정책의 키를 잡고 탁상행정을 벌이는 것이 병폐다. 경제 논리로 풀지 않고 정치 논리로 풀겠다는 정치권이 기업인의 피 말리는 고통을 모르는 무책임 생색 정치의 폐단이다. 오죽하면 “정치인과 기저귀는 자주 갈수록 좋다”는 유행어가 나돌고 있겠는가.
대다수 업종이 대동소이하지만 섬유산업 같은 전통산업은 하루가 다르게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고 있다. 그럼에도 업계의 각자도생 전략은 무디기만 하다. 산업정책을 책임지는 정부 주무 부처는 죽건 살건 알아서 하라는 식이다. 단체나 연구소도 제구실을 못 해 토사곽란의 섬유산업에 처방을 못 내고 있다.
섬유 각 스트림 모두 “살겠다”는 자신감보다 “못 해 먹겠다”는 체념으로 일관한다. 국내에서 어떻게 든 기업을 영위해 보겠다는 각오보다 “나가야 산다”는 조급증에 해외 탈출을 모색하고 있다. 사람은 없고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에 근로시간 단축까지 “받아놓은 밥상”이 돼 버렸다. 더욱 억장이 무너진 것은 국내 공장의 해외이전도 내놓고 못 하고 죄지은 것처럼 몰래 슬금슬금 옮기는 처지가 돼 버렸다.
실제 최저임금 인상으로 직격탄을 맞은 면방업체가 국내공장을 폐쇄하거나 해외이전에 앞장서고 있다. 대방(大紡)마다 베트남으로 이전했고 또 남은 공장도 대거 이전을 추진하고 있다. 이들 면방기업들은 최근 내부적으로 국내공장 이전을 확정하고 진행하면서 외부로 공개를 안 한다. 지난번 최저임금 인상으로 공장 폐쇄와 해외이전계획을 공개했다가 산업부 장관까지 노기등등한 데 따라 정부로부터 미운털이 겁나기 때문이다. 지난 14일 중남미 시장조사차 떠난 면방업계 사장단들이 출국 사실을 공개하지 않고 소리소문없이 간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전성기 때 370만 추에 달하던 국내 면방설비가 올해 60만 추대로 급감한 기막힌 현실은 국내에서 기업할 수 없다 판단 때문이다.
또 우리 섬유 산업의 대들보인 화섬 산업부터 언제 어떻게 붕괴 될지 숨을 죽이고 있는 모양세다. 지난주 대구 섬유업계의 원로 중진이 중국 화섬업체 몇 군데를 둘러보고 중국의 발전에 혀를 내둘렀다. 자동화 설비 규모와 품질과 생산성은 물론 신소재 개발이 일본 뺨칠 정도라는 전언이다. “한국 화섬산업이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이 중국은 비행기로 날아가고 있다”고 비유했다.
국내 섬유산업의 버팀목인 직물업계의 대응책 또한 앞뒤가 막막한 처지다.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 등지로 탈출하는 것이 섬유업계의 대세지만 단순 제직이나 편직은 별다른 승산이 없다는 것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것 같다. 다시 말해 인력 수요가 많은 염색가공 등과 함께 진출할 때는 저임금을 활용해 메리트가 있지만 인력 수요가 많지 않은 단순 제직이나 편직은 임금 절감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명제는 분명히 설정돼 있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빚어진 부담을 줄이면서 생산성과 품질로 승부하기 위한 자동화 설비투자가 우선 대안이다. 이를 바탕으로 중국· 대만산 직물과 가격 경쟁을 겨냥해야 한다. 중국· 대만보다 비싼 값에 국산 소재를 사용해달라고 요구한 것은 쌍팔년도 사고다. “외할머니 떡도 싸고 맛있어야 사 먹는 것”이다.

 

승승장구 의류벤더 어제가 옛날

필자가 의류수출벤더들을 향해 같은 값이면 국산 소재를 써달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비싼 값에 사달라고는 못 한다. 실제 의류 수출 벤더들의 경영환경도 어제가 옛날이다. 기라성 같은 간판급 의류벤더인 세아상역· 한세실업· 한솔섬유를 예증으로 볼 때 지난해 이들의 영업이익이 반 토막 난 것으로 나타났다.
바이어들의 가격 후려치기는 연중행사이고 환율 쇼크까지 겹쳐 수익이 크게 감소했다. 이들은 한국산 소재보다 값싸고 질 좋은 원부자재를 찾아 지구촌 구석구석을 돌며 현지화를 진행할 수밖에 없다.
상대적으로 값이 비싼 한국산 소재 사용은 더욱 줄어들 수밖에 없다. 자동화 설비로 원가를 줄이고 차별화로 승부 하는 것이 살아남는 처방이다. 세상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요술은 없다. 삽질해야 물이 고인다. 물론 쉽지는 않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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