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산업통상자원부가 각 업종별 단체를 통해 해당 업종의 올해 일자리창출계획을 보고해달라고 채근하고 있다. 며칠 전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주재한 청년 일자리 점검 회의에서 참석한 관계 장관들을 공개 질타한 후속 조치다. 당시 문 대통령은 “각 부처가 정부의 국정지표 최우선 과제인 청년 일자리 문제해결에 미온적으로 대처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문 대통령은 “향후 3~4년간 한시적이라도 특단의 대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더욱 절망적인 고용절벽이 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섬유패션 단체들도 산업부 섬유세라믹과로부터 새해 “섬유패션업계 고용창출계획을 조사해서 보고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문 대통령 스스로 ‘국가재난’이라고 언급했던 청년 일자리 문제인 만큼 주무 부처가 득달같이 이를 조사보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산업부로부터 이같은 요청을 받은 섬유패션단체들은 떨떠름하며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일자리 창출조사 허탈한 탄식

회원사에게 새해 고용계획을 물어보는 것 자체가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지금 산업현장에는 어떻게 하면 사람을 줄이느냐에 머리를 싸매고 있는 처지인데 고용계획을 물으면 “염장 지르는 소리”로 들릴 수 있는 것이다. 문 대통령이 지난주 4조 3교대 주 24시간 근무로 일자리 창출 모범을 보인 태양광 업체 한화큐셀공장을 방문해 “업어주겠다”고 말한 것을 섬유 기업들을 먼 나라 얘기로 보고 있다. 신규 고용은커녕 기존 일자리가 날아가지 않고 유지만 할 수 있어도 감지덕지다. 이대로 가면 30만 근로자가 종사하는 섬유 사업장 인원이 수년 내 반 토막 날 위기를 맞고 있다. 너도나도 자동화 투자로 사람을 줄이거나 해외로 탈출하는 것이 사는 길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산업현장 실상을 들여다보면 국외자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금방 알 수 있다. 최저임금이 올해부터 기본금 16.4% 올라 시급 7530원이 되면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퇴직금, 4대 보험을 포함해 연장수당, 상여금도 따라 오를 수밖에 없다. 최저임금 해당자뿐 아니라 차상급, 간부들까지 덩달아 연쇄반응으로 작용한다.
오죽하면 섬유산업 중 면방업계가 지난 7월 최저임금인상이 결정되자마자 “기업 못 하겠다”고 가장 먼저 들고 일어났겠는가. 최저임금적용 대상자가 40%에 달한 면방업계는 진짜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 84년 전통의 전방이 광주 임동공장과 시흥 염색공장을 지난 연말 문을 닫고 말았다. 전방뿐 아니다. 국일방 자회사 격인 국일유니밀도 새해 들어 1월 말을 끝으로 조치원공장 문을 닫았다. 각 공장마다 200명 가까이 근무하는 사업장이다.
국내 공장 문을 닫으면 설비를 매각하거나 해외로 이전하게 된다. 국내 공장은 거미줄과 곰팡이만 가득하고 알짜는 해외로 나간다. 덩치 큰 면방보다 직물업체의 해외 탈출은 훨씬 수월하다.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비교적 투자 규모도 작고 안착하기도 수월하다.
봉제가 가장 먼저 떠나면서 국내에 공동화 현상이 생긴 데 이어 허리로 버티던 직물산업까지 문 닫거나 해외로 나가면 섬유산업은 끝장이다. 국내 최대 섬유 산지인 대구 경북 화섬 직물업계가 지금 심하게 요동치는 요인이 여기에 있다. 고임금과 인력난으로 경쟁력을 잃고 시난고난 버티던 대구 산지 섬유업체들이 인상된 최저임금과 근로시간 단축이 임박하자 자포자기 상태로 빠져들고 있다. 그동안 몇십 년 재미를 보며 재력을 구축한 돈 많은 회사들이 일찌감치 포기해버린 상당수 먹튀 가연업체처럼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다.
대구 섬유업계의 리더 중 한 사람인 A 사장은 “4~5년 내에 회사가 거덜 나는 것을 불을 보듯 뻔하다”고 체념 섞인 하소연을 털어놓고 있다. 아직은 비교적 잘 나간다는 그가 이 정도로 낙심천만 패닝상태라면 다른 기업인들 오죽하겠는가. A 사장은 “그동안 신념을 갖고 섬유 기업을 영위하며 남보다 많은 투자를 했지만 돌아가는 통박이 갈수록 가물가물해 기업정리를 준비하겠다”고 노골적인 포기 입장을 밝혔다.
한마디로 이대로 가면 국내 섬유산업이 알맹이는 다 빠져나가고 쭉정이만 남을 가능성이 크다. 국산 소재 산업의 수급에도 곧 비상이 걸릴 수 있다. 한때 370만 추에 달하던 국내 면방설비가 올해 70만 추 규모로 줄어들면서 벌써 코마사는 물론 장갑사 수급까지 차질이 생기고 있다.
국내 화섬산업의 미래도 빨간 전조등이 켜지고 있다. 설비투자가 수십 년 답보상태다 보니 생산성과 품질경쟁에서 갈수록 뒤처지고 있다. 중국과 베트남 등 경쟁국이 대규모 최신설비로 무장하고 FTA를 무기로 무차별 한국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국내 메이커의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속수무책으로 안방 시장을 내주고 있는 것이다.
차별화 소재가 안나오고 가격 경쟁력까지 떨어지다 보니 수요자들이 수입사를 선호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외할머니 떡도 싸고 맛있어야 사 먹듯’ 가격 싸고 품질 좋은 중국, 베트남산 소재 사용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지난해에도 국내 화섬메이커 대부분 폴리에스테르 필라멘트부문에서 모조리 적자를 봤다. 화섬메이커 오너들이 자선사업가가 아닌 이상 장기적자가 해소되지 않으면 어느 날 갑자기 문 닫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화섬사와 면사의 자급이 안 되면 수입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때는 중국· 베트남산 원사가격이 부르는 게 값이 될 것이다. 세계 염료생산을 독점한 중국의 염료가격 횡포가 섬유 소재로 전이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대구를 비롯한 섬유산지의 경영방식 또한 차별화에 굼떠 천수답경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차별화로 승부를 걸어야 하지만 이를 위한 설비투자나 개발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선도업체가 차별화에 성공하면 들쥐 떼처럼 너도나도 카피하고 가격을 후려쳐 시장을 망치고 있다. 설상가상 최저임금인상으로 야간작업 휴일 근무를 포기해 경영수지가 급속히 악화되고 있다.

 

섬유 살리는 산업정책 급하다

섬유산업 상황이 이같이 절박하고 엄중한데도 정부의 산업정책은 손에 잡히기는커녕 장밋빛 청사진뿐이다. 산업이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데 단기 응급조치와 중장기 처방이 안 보인다. 통틀어 180억 원에 불과한 섬기력 자금을 6개 섬유 패션주관단체가 시행하는 과정에서 “줄이겠다, 빼겠다”며 규제와 간섭이 이만저만 아니라는 여론이다. 공무원들이 기업현장에 파고들어 피 말리는 현장의 실상과 소리를 새겨듣고 고단위처방을 마련해야 한다.
차제에 우리 섬유산업이 어디서부터 잘못되고 있는지 고비용 저효율 시스템과 협업문제까지 포함해 정확히 진단하고 복기(復碁)해야 한다. 과감한 설비투자와 기술개발· 시장개척에 통 크게 지원책을 강화해야 한다. 이대로 가면 수년내에 게도 구럭도 다 놓친다. 섬유산업의 단기처방은 물론 미래 먹거리를 위한 국책사업을 다양하게 발굴하고 추진해 섬유패션 강국의 청사진을 제시해야 한다.
기업도 각자도생의 냉엄한 시장원리를 되새기며 사즉생(死卽生) 각오로 투자하고 차별화에 올인해야 한다. 남의 제품 카피로 무임승차하던 시대는 지났다. 하기에 따라 길은 얼마든지 있다. 미국 경기가 회복되고 전 세계 시장은 널려있다. 살아남는 기업이 승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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