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견 패션업체 A에서 인턴으로 일한 김미숙 씨(가명·여)는 팀의 막내였지만, 사무실 냉장고에 음료수와 얼음을 사비로 매일 채워 넣어야 했다. 한 달 뒤에 전도금으로 돌려받았지만, 100만원(식대 포함) 급여에선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나마 중간에 인턴을 그만두면 돈을 돌려받기도 어려워 속앓이도 했다. 근무하는 동안 10시 이전에 퇴근한 적이 거의 없었으며, 야근수당·주말수당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 여성복 전문기업 B에서 인턴으로 일한 이민정 씨(가명·여)는 80만원의 적은 월급에도 불구하고 디자이너를 꿈꾸며 야근을 마다하지 않았다. 저녁 식대 미지급은 물론, 상사눈치에 굶고 일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집이 경기도여서 지하철 막차를 놓치면 그 때마다 자비로 택시를 타야했다. 3개월 뒤 정직원 전환을 꿈꾸며 무시와 고된 업무를 버텼지만, 빈말에 불과했다. 몇 개월이 지나서도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고, 결국 회사를 그만뒀다.

 

 

 

 
새해 벽두부터 패션계는 물론 대한민국 전체가 이른바 ‘열정페이’ 논란으로 시끄러웠다. 열정페이는 일자리를 원하는 청년이 많아지면서 이들의 꿈과 희망을 담보로 업무량에 비해 턱없이 낮은 임금을 지급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름 석 자만으로도 대한민국 패션업계를 쥐락펴락했던 유명 디자이너들은 열정페이의 주인공으로 세간에 오르내리면서 여론의 뭇매를 고스란히 맞아야 했다. 사과문을 통해 반성과 개선약속을 밝히고 나서야 성난 민심은 가라앉힐 수 있었다.
이후 한 달가량 시간이 흘렀다. 열정페이는 어느덧 대중의 관심 테두리 밖으로 밀려났고, 온·오프라인 매체를 부유하던 복잡다단한 이슈들도 가라앉았다. 그리고 핵심본질인 ‘패션 고용·업무 환경’이라는 불편한 진실이 선명하게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모든 패션 업계가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함께 고민하고 찾아야 할 숙제와 마주해야 할 시기가 된 것이다.

 

정직원 미끼 희생 강요 ‘폭력’과 다름없어
본지는 이러한 맥락에서 열정페이의 시작점이었던 지난해 11월부터 취업준비생과 직장인을 대상으로 패션업계 업무환경 실태에 대한 취재를 진행했다. 그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중소기업은 물론 대기업까지 열정페이 근무 환경이 크게 다르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개인 디자인실보다 더 조직적이고 심각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열악한 급여와 근무시간 초과, 근로계약서 미작성, 수당 미적용 등은 취합한 자료의 기본 옵션이었다. 정직원 전환 약속 미이행은 사회에 첫 발을 내딛은 청년들에게 ‘폭력’과 다름없었다. 또한 개인의 실력과 가능성보다 신체 조건과 거주지(서울 강남)를 채용 기준으로 삼는 경우도 잦아 열패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중견 패션기업에 인턴으로 근무했던 제보자는 “사무실 냉장고에 음료수와 얼음을 매일 사비로 채워 넣어야 했다”고 털어놨고, 여성복 전문기업 디자인실에서 미래 디자이너를 꿈꾸던 청년은 “수 개월간 고용계약서도 작성하지 않고 피팅만 하다가 2달째 되던 날 저녁 갑자기 해고통보를 받았다”고 하소연했다.

한 여성 디자이너 지망생은 30초 면접에 대해 털어놨다. 그는 “열심히 취업용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가도 눈길 한 번 안주고, 옷 한벌 입어보는 게 면접의 전부였다”며 “어떤 곳은 그냥 한 번 훑어보곤 ‘됐다’는 말로 면접을 30초만에 끝낸 곳도 있었다”고 말했다. 현재 그녀는 피팅 때문에 체형교정 수술까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대기업 디자인실에서 3년째 일하고 있다는 또 다른 제보자는 “야근과 주말근무는 그렇다 쳐도 내부규정으로 확보된 연·월차도 분위기상 한 번도 쓰지 못했다”며 “디자이너라는 명함을 달고 한 일이라곤 수입의류 사진 찍어서 카피하는 일이 전부여서 자존감도 무척 낮아졌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피해 사례에 관해 노무전문가는 “인턴은 최저임금 위반, 근로계약서 미작성으로 회사를 신고할 수 있고, 정직원은 연장·야간근로수당 위반 문제가 있다”고 설명하면서도 “기업인의 본질적인 경영 마인드가 바뀌지 않는 이상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조언했다.  

한편 열정페이 사례로 소개된 A업체와 B업체는 각각 내부 조사와 환경 개선을 약속했다.
A업체의 홍보 담당자는 “회사 내에 그런 사례는 없는 것으로 알지만, 내부적으로 확인하겠다”고 말했고, B업체의 인사 담당자는 “지난해부터 근로계약서 작성·최저임금 준수 등 내부적으로 부조리했던 부분들에 대한 개선작업을 하고 있다”고 알려왔다.

패션 기업 핵심인재 육성 나서야
국내 패션·잡화 시장 규모는 대략 60조원대로 추산되고 있다. 업계 종사자는 80여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업계의 오피니언 리더들은 패션산업을 두고 IT·BT 못지않은 지식정보 산업이고, 선진국형 고부가가치 산업이며, 문화 창조산업이라고 말한다. 또한 글로벌 시장 도전을 통해 패션 한류를 실현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설파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환경에서 독창적인 캐릭터와 창조적인 디자인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최근 패션시장 환경은 자본력과 유통력을 갖춘 중견기업은 수입브랜드에 대한 소비자 호감도가 높아지고, SPA의 저가 물량공세에 밀리며 핵심 경쟁력인 디자인 역량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는 상황이다. 업계는 중견패션기업이 조직력이나 전략 수립 및 실행 등에서 회사 규모에 걸맞은 인적 인프라를 구축하지 못한 것을 주요한 요인으로 지적하고 있다. 

패션 교육기관 관계자는 “수입 브랜드에 맞서려면 세계 시장의 추세에 맞춰 브랜딩하는 능력이 필요하지만, 제대로 할 수 있는 핵심인재가 없다는 것이 문제”라며 “한국 패션기업은 합리적·창의적 기업문화 조성과 탄탄한 인력관리 시스템 재설계가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말했다.

반면 대기업 브랜드 디자인 실장은 “업계 시스템이 문제점이 많고 개선해야 한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지만, 현실은 대기업도 마케팅이나 MD분과에 비해 디자인 쪽은 열악한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그래도 많은 디자이너들이 성장하고 업계에서 역할을 하고 있는 만큼 디자이너를 지망하는 청년들도 더욱 치열하고 진지한 자세가 요구된다”고 이해를 구했다.

하지만 인재를 가려 육성하는 기초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다면 토종 글로벌 브랜드의 탄생은 사상누각(砂上樓閣)에 불과하다는 데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없었다. 

패션기업들은 이번 열정페이 논란에서 여론의 질타를 면했지만, 이 담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이제 합리적·창의적 기업문화 조성과 탄탄한 인력관리 시스템 재설계로 체질개선에 나서야 한다. 불황과 경쟁심화로 인한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는 터닝포인트, 부끄러운 민낯과 마주한 ‘지금’이 바로 적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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