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초입에 하늘은 푸르고 투명하지만 땅에서는 국태(國泰)가 흔들리고 민안(民安)이 불안하다. 소득은 줄고 빚은 늘어나고 살기가 팍팍한데 온 나라에 질그릇 깨지는 파열음이 귀청을 때린다.국보법 폐지와 수도이전, 과거사 청산을 둘러싸고 정치권이 또다시 피터지는 싸움에 몰입하고 있다. 여야 모두 제논에 물대기식 자기 중심적 역선전이 하도 능해 안방에 가면 시어머니 말이, 부엌에 가면 며느리 말이 맞는 것 같아 혼란스럽다.무절제하고 몰상식한 정치권싸움에 순진한 국민들까지 내편·네편으로 갈려 여기저기서 악에 바친 삿대질이 예사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한낮이 다 되도록 마수걸이도 못하고 체념이 길게 밴 한숨소리뿐인데 국민을 걱정해야할 정치권이 해도 너무한다.동우·건익 은행이 죽였다물론 명분이야 국가의 균형발전을 시비할 수 없다. 또 잘못된 역사의 질곡과 족쇄에서 벗어나야 하는 당위성을 부인할 수도 없다.그러나 나라 곳간의 뒤주가 비었는데 천도(遷都)를 하겠다니 어안이 벙벙하다. 또 글로벌시대에 분초를 다투며 경쟁하는 세상에 60년 100년전 고래짝 시대를 들춰 자손들에게 연좌제를 하겠다는 것도 한심한 발상이다.설상가상으로 분단국민의 안정희구 심리를 자극하는 보안법폐지를 밀어붙이려는 것도 위험한 발상이다. 통치용으로 악용된 조항만 개정하면 됐지 송두리째 폐지하겠다는 것은 불을 안고 섶에 들어가는 꼴이다.다시 우리 얘기로 돌아와 대명절 추석을 앞두고 섬유업계에 불안정 가연심리가 팽배하고 있다. 극심한 소비침체로 고통받아온 내수패션업계에 9월 대란설이 나돌면서 믿거나 말거나 살생부가 떠돌고 있다.지난 8월초엔 비교적 건실한 것으로 알려진 중견합섬직물업체 건익통상이 기업을 포기하고 간판을 내리더니, 엊그제는 대형 트리코트업체인 동우섬유가 거액부도를 내고 말았다.합섬직물의 극심한 경기 침체 속에 서울 명동과 충무로 일대에 산재한 소규모 트레이딩 업체들도 금년추석과 연말을 거치면서 60%이상이 정리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물론 이같은 소문은 과장된 엄살이 많지만 돌아가는 통박은 여러 가지로 낙조가 드리워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여기서 특기할 것은 최근 떡쌀을 담근 동우나 건익통상을 비롯한 부도기업들은 경기불황보다 더 무서운 은행의 대출회수에 결국 백기를 들었다는 사실이다. 한때 7000만 달러규모를 수출하던 동우는 자체 염색가공공장을 새로 건설하면서 많은 돈을 투자했다.해외경기침체로 외형이 줄고 은행의 금융한도도 줄었지만 비교적 건실하게 꾸려가는 과정에서 은행의 목조르기가 시작됐다. 몇 달전 이 회사 사장이 4년만에 거래은행을 방문해 금융지원을 요청했으나 은행측이 죄인 다루듯 대출금회수를 강요했다.은행이 기업 죽이는 것은 식은죽먹기인데 이 회사도 결국 백기를 들고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섬유기업뿐 아니라, 대다수 중소기업이 은행의 목조르기에 속절없이 쓰러지고 있는 것이다.이처럼 피도 눈물도 없이 운영을 하니까 저금리 시대에 은행마다 올해 사상 최대 순익을 내고 있는 것이다. 기업에 불황보다 더 무서운 저승사자가 은행이란 사실을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특히 은행들이 섬유업종에 유난히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것은 은행 내규로 정한 대출시스템 때문이다. 은행이 적용하고있는 신용평가 기준을 보면 옴짝달싹 못하게 목조이고 있는 것이다.안정성과 수익성, 활동성, 성장성으로 대별되는 업종별 평가항목에 추가적인 공통평가항목으로 사업성, 경쟁력, 경영능력, 신뢰성, 기타항목으로 구분해놓고 있다. 수익성 부문에서도 총자산 경상이익률과 매출액영업이익률, 금융비용, 매출액을 세분화하고, 다시 성장성 부문에서 매출액 증가율을 따진다.가뜩이나 섬유를 사양산업으로 몰아 사업성, 성장성을 꼴찌로 보고있는 은행들이 매출액과 이익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시장상황을 고려할 때 평가기준이 나쁠 수밖에 없다.이를 기준으로 A+부터 A-, BBB+, BBB-, BB+, BB-, B+, B-, CCC, CC, C, D로 열두단계의 신용등급을 매긴다. 신용등급 보통인 B+ 미만은 신규대출이 억제되며 CCC에서 D까지 하위 4단계는 요주의 업체로 가차없는 대출금회수 대상이다.이같은 신용평가 기준을 적용할 경우 섬유는 안정성, 수익성, 성장성, 사업성, 경쟁력을 포함한 전체 평가기준에서 낙제점 받기 일쑤다. 기업의 재무구조와 사업성을 소상히 알고있는 지점장의 재량권이 사라지고 지점장 대출전결 한도가 종전 20억~40억원에서 1억~5억원으로 줄어들어 본점 심사부의 기계적인 서류심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따라서 섬유업계가 과장된 죽는소리를 하건 안하건 유리 들여다보듯 기업 내부사정을 꿰뚫고 있는 은행이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 바로 은행권의 현행 대출시스템을 고치지 않고는 은행의 의존률이 높은 섬유기업은 추풍낙엽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장관이 나서 보증한도 늘려야그래서 필자가 중언부언 강조한 내용이 섬유를 중심으로한 중소기업의 대출제도 개선방안이다. 현행제도하에서는 대통령이 지시해도 은행이 말을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은행의 손실 부담을 줄여주면서 산업을 보호하는 방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바로 신용보증을 비롯한 보증한도를 대폭 늘려 만약의 경우 손실을 줄여주는 제도를 마련해야 된다. 이것은 개인의 힘이나 단체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재경부나 금융감독원의 적극적인 개입이 전제돼야 한다. 때로는 대통령에게 또는 경제장관회의에서 산업자원부 장관이나 중소기업청장이 제조업의 특성과 육성을 위해 금융정책을 과감히 개선하도록 건의하고 설득해야 한다. 섬유는 폭리가 어렵지만 부가가치와 고용은 물론 생명력이 고래심줄처럼 강하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현행 돈장사 개념의 대출시스템으로는 섬유기업이 다 죽는다. 이 절박한 문제를 풀어야 할 당사자가 산업을 책임지고 있는 주무장관인 것이다. 이것이 관철되도록 섬유업계와 유관 단체가 때로는 봉기하는 심정으로 정부를 설득하고 채근해야한다. 업계나 단체, 산자부가 방안퉁수처럼 앉아있으면 게도 구덕도 다 놓칠 수밖에 없다. 불황은 시간으로 극복할 수 있지만 생사여탈권을 쥐고있는 은행의 독선과 일방통행을 감당할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本紙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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