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들이여! 그대들이 사공이라면 배를 들고 산으로 가라”

실현가능한 꿈, 대단히 현실적이고 보기 좋은 꿈을 평생 딱 한 번 꾸는 것. 그것을 그럴싸하게 이뤄 내는 것이 ‘성공신화’로 조명 받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어쩌면 우리에게 일찍 늙기를 권하는 시대인지도 모른다. 못 지킬 말은 하지 않고 못 이룰 꿈은 도전하지 않는 것이 어른스럽고 철 든 행동이라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여기 한 패션 디자이너가 있다. 네 번의 겨울을 보내고 나면 꽉 찬 이순(耳順)의 나이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 하던 미술학도에서 패션으로 전공을 바꿨고, 무작정 파리 유학길에 오르는가 하면, 대기업 디자인 실장 자리를 박차고 자신의 브랜드를 론칭했다. 도전의 반복 속에서 누구나 꿈꾸는 큰 성공도 맛봤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말한다. “저이는 정말 멋지게 꿈을 이뤄냈군.” 하지만 그는 “아직”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사람 좋은 웃음 속에 뜨거운 열정을 품은 남자, 디자이너 장광효.
패션 디자이너로서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본다.
글?사진=원유진 기자 ssakssaky@itnk.co.kr


- 대학 카니발에 중년부인과 댄스… 엉뚱하지만 유쾌한 경험이 디자인 자양분
- 누구보다 빠른 ‘성공’, 그리고 배신과 상처… 모든 것 내려놓자 오히려 행복
-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이 바로 성공의 지름길… 현실안주 말고 더욱 노력해야

※화가를 꿈꾸던 소년 패션에 눈뜨다

- 학창시절 미술을 공부한 걸로 안다.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패션 디자이너로 진로를 바꾼 계기가 궁금하다.
“학창시절을 보낸 곳은 서울이지만 태어난 고향은 전라남도 강진이다. 정약용의 정신이 서려있고, 윤선도의 멋이 숨 쉬는 아름다운 곳이다. 자연스럽게 예술적인 DNA를 타고난 것같다.(웃음) 배운 적도 없었는데 그림을 썩 잘 그렸다. 선생님도 재능을 인정해 미술을 권했고, 나 역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1차에 지원한 서울대 서양화과에 떨어지고 말았다. 다시는 그림을 안 그리겠다고 결심하고 2차에 디자인 대학을 가게 됐다. 사실 의상디자인학과를 가고 싶었지만, 남학생은 받아주지 않았다. 학교측에 항의를 했더니 디자인 전공을 하고 부전공으로 의상을 하라는 제안을 했고, 이를 수용했다.”

- 대학교 축제 카니발에 중년의 부인과 파트너를 이뤄 참석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학과 특성상 여학생이 대부분이었다. 자연히 여자 친구들은 많았지만, 카니발에 함께 갈만큼 깊은 관계의 여학생은 없었다. 그때 정릉에 살았는데, 동네 유치원의 한 중년 부인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같은 분이었지만 너무 아름다웠다. 용기를 내서 프러포즈를 했고, 카니발 당일 멋지게 차림으로 함께 카니발에 참석해 주셨다. 요즘 말로 ‘여신 포스’였다. 그 분과 함께 짝을 이뤄 춤을 췄다.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알고 보니 교수님들과도 친분이 있으신 분이었다. 그 분이 바로 지휘자 금난새 씨 어머니이신 전혜금 여사셨다. 금난새 씨도 동네 목욕탕에서 두어번 등을 밀어준 사이였고 말이다.(웃음) 세월이 흐르고 금난새 씨의 연주회에서 우연히 백발성성한 노인이 된 여사님을 뵙고 인사를 드렸었다. 너무 반가워하시며 내 손을 꼭 잡으시곤 눈물을 보이셨다. ‘그 때 너무 행복했다고’말씀하시며…. 엉뚱했지만 이런 소소한 경험들이 지금 디자인을 하는 자양분이 된 것같다.”

- 연상이 잘 안 되지만, 손석희 교수와 절친이신 걸로 알고 있다.
“석희는 내 어둠을 밝혀주는 친구였다. 나와 마찬가지로 1차에 낙방하고 같은 독서실에서 함께 후기를 준비하며 친해졌다. 석희의 권유로 같이 국민대학교에 지원해서 합격을 했고, 졸업 후 아나운서와 무대미술로 함께 MBC시험을 봐서 합격을 했다. 난 입사대신 대학원에 진학을 했고, 석희는 유명한 아나운서가 됐다.”

※디자이너로서의 성공 그리고 시련

- 파리 유학을 마치고 귀국 후 카루소 론칭이 아니라 앞서 대기업에 먼저 취업을 했다.
“캠브리지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1년 정도 근무를 했고, 제일모직에서도 일을 했다. 그리고 논노에서 날 스카우트했다. 당시는 남성복 디자이너가 드물었기 때문에 내가 스카우트 1순위였다. 논노에서 디자인 실장을 하며 월급을 500만원이나 받았다. 그때 청담동 50평 아파트 가격이 500만원이었으니까 파격적인 대우였다.

하지만 받은 만큼 정신없이 일했다. 새벽에 나와서 새벽에 들어갔으니까.(웃음) 그러다가 논노가 덜컥 부도가 났다.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됐는데, 국내에는 내 급여를 맞춰줄 수 있는 회사가 없었다. 2달을 쉬었는데, 일주일 후부터 일이 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위험한 도전이었지만 내 브랜드를 걸고 남성복 디자이너 숍을 론칭했다. 그때가 1987년 9월이었다.”

- 카루소 인기는 대단했다. 당시 학창시절 최고의 졸업식 패션은 카루소 정장일 정도였다. 기자도 카루소 슈트를 누구 보다 갖고 싶었었다.
“카루소를 오픈하자마자 정말 잘 됐다. 들어오는 손님에 맞춰 옷을 만들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한참 잘 나갈 땐 백화점과 대리점이 서른네 개나 됐다. 카드결제 시스템이 없던 시절이라 모두 현금 결제였다. 본점만 하루 매출이 5000~6000만원이었다. 돈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벌었다.”

- 성공 뒤에 시련의 그림자도 따른 것으로 안다.
“어느 날 파리에 갔다 왔는데, 회사 직원들이 아무도 없었다. 알고 보니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설악산 여행을 다녀 온 거였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매장 입금 통장 속 돈은 사라졌고, 원단 결제는 모두 외상이었다. 그 날로 백화점 매장과 대리점 모두 정리하고 직원들도 모두 내보냈다. 후폭풍도 모두 감내했다. 그 순간 회사를 세탁기에 넣고 흔들듯 정리하지 않으면, 내가 파악할 수 없는 곳에서 더 큰일이 터졌을 지도 모른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외부에서 지켜보는 백화점이나 바이어들은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고 부도가 났다는 소문도 돌았었다.”

- 사람에게 받은 상처, 치유하는 데 시간이 걸렸을 것같은데.
“너무 이른 나이에 찾아온 성공의 부작용이었다. 너무나 속상했고, 사람이 무서웠다. 지금이었다면 그렇게 운영하지 않았을 테지만… 비싼 수험료를 치른 셈이다.

주변을 정리하고 압구정동의 반지하 단독주택으로 옮겼다. 거기서 1년 동안 컬렉션하고 단골손님들 옷을 만들며, 업무 관계자와 손님 외에 사람을 일체 만나지 않고 지냈다. 그런데 우연히 집 앞에서 도둑고양이 한 마리를 만났다. 몇 번 소시지를 줬는데 녀석이 넉살좋게 사무실로 따라 들어와 내 발밑에 터를 잡더니, 새끼까지 낳았다. 또 그 새끼가 새끼를 낳다보니 내 별명이 어느새 ‘고양이 아빠’가 돼있었다.(웃음) 역설적이게도 그 시간이 나에겐 가장 행복했었다. 사람은 가장 어려울 때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자기 안에 갖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고 모두 내 탓으로 돌려, 적을 만들지 않았던 게 행복감을 갖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에너지를 준 것이다. 고통의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치유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새롭게 시작한 홈쇼핑이 대박이 났다.”

- 당시 일류 패션디자이너에게 저가제품 일색인 홈쇼핑 진출은 그야말로 도전이었을 텐데 망설이지 않았나.
“홈쇼핑을 처음 시작할 당시 선배님들의 우려가 많았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네 코가 석였다.(웃음) 나도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왕 할 거 제대로 한 번 해보자 마음을 먹고 시작했다. 그랬더니 난리가 났다. 한 시간에 12억씩 팔리기도 했다. 진행하는 3년 동안 원없이 옷을 만들고 팔 수 있었다. 그 후 많은 후배들이 홈쇼핑에 뛰어들었지만, 나만큼 성공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처음이라는 메리트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 홈쇼핑 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도전하기를 즐기는 것 같다.
“패션 디자이너라는 고정된 범주에서 봤을 때 ‘외도’라고 할 수 있는 일들을 많이 했다. 인테리어, 무대의상, 여성용품 디자인, 드라마와 홈쇼핑 출연까지. 하고 싶은 일에서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름 앞에 붙는 1호라는 별칭이 유달리 많다. 그러면서도 단 한 번도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은 이유는 내 안에 패션 디자이너라는 중심이 굳게 서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쾌하게 여러가지 도전을 할 수 있었고, 다양한 경험은 다시 패션 디자인으로 녹아들어 창작의 자양분이 되어줬다.”

※후배들에게 전하고픈 마음 속 이야기

- 이야기를 패션계로 확장해 보자. 이웃 나라인 중국이나 일본은 이미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를 배출했지만, 우리는 아직이다.

“내가 파리에서 처음 패션쇼를 할 때 받은 느낌은 ‘한강에 돌 던지기’였다. 여성복 디자이너로 명성을 떨치시던 진태옥 선생님이나 이신우 선생님, 이영희 선생님이 앞서 간 후 였지만, 여전히 그들 눈에 비친 한국의 모습은 지금 우리가 보는 동남아 혹은 아프리카의 어느 후진국, 딱 그 수준이었다. 사비를 들여 비공식 1회 공식 6회 쇼를 계속 진행했지만, 어깨를 같이하고 경쟁할 수 없는 유리천장이 존재했다. 반면 당시 일본은 이미 무역규모와 위상이 세계 톱클래스였다. 파리에서 9~10회 쇼를 한 자국 디자이너들이 집중 조명을 받고 있었다.
지금 우리나라의 대외 인지도와 이미지 모두 그때 일본 수준 이상으로 높아졌다. 디자이너들이 해외에 진출해 경쟁하고 인정받을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 진 셈이다.”

- 하지만 내수 호황이었던 이전과 달리 최근 글로벌 브랜드들의 진출로 상황이 신진 디자이너들에게는 혹독하기만 하다.
“나를 포함한 선배들이 한창 활동할 당시는 수백억 매출 규모에 유통망도 갖추고 건물도 소유한 디자이너들이 많았다. 모두 황무지에서 이룬 성과였다. 물론 수입브랜드들이 진출하면서 디자이너들의 영역을 차츰 침범하며, 종국에는 경쟁할 수 없을 만큼 격차가 벌어지고 말았다. 그건 높은 파도를 막아줄 든든한 방파제 역할을 잘 못한 선배들의 잘못이 크다.

하지만 지금 후배들을 보면 현실을 탓을 하기에 앞서 지원과 환경 모두 비할 바 없이 좋아진데 비해 이전보다 경쟁력이 약해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요즘엔 지원금 받아 쇼 한 번 하고나면 마치 성공한 것처럼 거품이 들어간 친구들도 많다. 터지고 쓰러지며 도전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더욱 치열하게 노력하고 고민해야만 한다.”

- 패션디자이너의 길을 가고 있는 후배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속담이 터키에도 있다. ‘의견이 많으면 엉뚱한 결정이 나올 수 있다’는 우리의 해석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동로마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의 성벽은 해자를 이용해 해전에 능하지 않은 오스만투르크가 함락하기 쉽지 않았다. 무려 1000년이 지난 15세기 중반에서야 이 철옹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 해답은 바다가 아니라 배를 끌고 산으로 올라간 것이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작전으로 비잔틴 군대의 저지선을 넘어 난공불락의 요새를 함락시킬 수 있었다.

후배들도 이미 남들이 하고 있는 것, 이미 널리 유행하는 것에 사고를 고정하지 말고, 다소 엉뚱하고 무모하더라도 산으로 배를 끌고 올라간 것처럼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일에 도전하라고 말하고 싶다. 그곳에 분명 지름길이 있을 것이다. 지금 가수 싸이의 세계적인 성공을 장담한 이가 누가 있을까? 시스템과 자본이 하지 못한 일을 발상의 전환으로 이뤄냈다.”

- 현재 패션업계의 헤게모니는 대기업에 넘어간 듯 보인다. 패션산업은 자본을 바탕으로 한 제조업으로 봐야 하는가? 아니면 섬세한 감각을 기반한 문화산업으로 봐야 하는가?
“자본과 감각 둘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패션을 문화없이 건조한 소비재로만 보기에는 한계가 있고, 대중에게 입혀지지 않는 패션 역시 존재 이유가 없다. 그래서 파리에도 ‘오뜨꾸띄루’와 ‘프레타포르테’가 있는 것 아니겠나.

나도 대기업에 근무를 했지만, 브랜드의 정체성과 존폐가 수익성에 좌지우지되는 환경에서는 명품이 만들어 지기 어렵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이태리처럼 가족형 기업은 어렵고, 옷 만드는 사람의 기교와 정신이 녹아나려면 중소기업형이 패션 비즈니스에는 적합한 것같다. 한섬이 좋은 사례였는데, 얼마 전 현대백화점에 넘어가서 많이 아쉬웠다.”

- 카루소는 당신의 분신과도 같은 브랜드다. 카루소의 향후 운영은 어떻게 할 계획인가.
“당장은 아니지만 몇 년 후 카루소를 맡아서 잘 운영할 사람이 있으면 넘겨주고 싶다. 역량있는 신인 디자이너도 몇 명 눈여겨 보고 있다. 만약 여의치 않으면 기업쪽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카루소의 철학과 이상을 지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건전한 기업이라면 카루소를 맡길 수 있다.”

- 향후 계획과 바람이 있다면.
“특별한 계획보다는 작품 활동은 열심히 하고 있다. 이미 10월 서울패션위크 작품은 8월말에 마무리 했고, 지금은 내년 춘계행사 구상 중이다.(웃음) 작품활동 뿐 아니라 봉사와 나눔도 더 열심히 실천할 계획이다. 시간이 흘러 사람들이 장광효하면 ‘옷도 잘 만들었고, 사람들에게 웃음도 줬고, 마음을 나누고 자연을 사랑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고 기억됐으면 좋겠다.(웃음)”

BOOK of my LIFE - 논어 등 동양고전
최근 장광효 디자이너의 화두는 논어를 비롯한 동양고전이란다. “논어를 읽다 보면, 이 한권의 책 안에 우리 미래의 답이 모두 있다”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고전은 오랜 시간에 걸쳐 사람들이 문제를 푸는 데에 수많은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도 살아 있는 자기개발서라 할 수 있다. 그는 “이제는 서양문화 중심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이제 동양의 것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가질 때가 됐다”며 “변화와 창조에 고전의 지혜를 활용하자”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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