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불꽃 남김없이 사르고 떠난 앙드레김, “우린 아직도 당신이 그립습니다”

내달 12일이면 디자이너 앙드레김이 우리 곁을 떠난 지 만 2년이 된다. 하지만 여전히 서울 신사동 ‘앙드레김 다자인 아뜨리에’는 오전 10시가 되면 어김없이 열리고, 주말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여전히 그의 이야기를 나누며, 그의 성대모사는 웃음 포인트로 위력을 유지하고 있다. 분명 시간은 흘렀다. 그러나 우리가 인식의 틀을 넘어선 2년이라는 흐름의 크기에 아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앙드레김이 그 만큼 넓은 대중의 격의 없는 사랑을 받아서일 것이다.

그의 패션 세계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는 게 사실이다. 고유한 패션 세계를 구축했다는 평과 현실성이 결여됐다는 평이 공존한다. 그러나 그 대립의 기저에는 한국 패션디자인 역사상 이름 자체로 브랜드 가치를 갖고 시대정신을 담아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공감이 자리하고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앙드레김을 추억하고 기억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본지는 그의 2주기를 맞아 ‘앙드레김 타계 2주기 특집’을 2회에 걸쳐 진행하고자 한다. 그 첫 번째로 한국 현대 패션사를 관통하는 그의 삶의 궤적을 살펴본 후, ‘앙드레김 디자인 아뜰리에’를 운영하고 있는 아들 김중도 대표를 통해 앙드레김 브랜드의 현재와 미래를 조명한다.
많은 패션인들이 그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을 함께 나눴으면 하는 바람이다.
<편집자주>

아프고 서럽게 사랑한 그 이름… 어머니
앙드레김은 1935년 현재 서울 구파발동인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구파발리에서 2남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세 살 때부터 계모의 슬하에서 자랐지만, 그는 친어머니처럼 따랐고 계모도 그를 친아들처럼 아껴주었다. 하지만 과거 계모와 슬하 자녀에 대한 정형화된 편견은 그를 괴롭혔다.

젊은 시절 영화배우로 활동할 정도로 준수한 모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앙드레김이 심한 외모 콤플렉스를 갖게 된 이유를 친어머니와 함께 살지 않는 것에 대한 사회적 열등감의 전이로 해석하는 심리학자도 있었다. 자신을 극진히 사랑하고 보살핀 새어머니를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앙드레김이 백여 벌의 흰색 옷을 소유하는 등 흰색에 집착하게 된 것도 매일 아침마다 그에게 양잿물에 새하얗게 빨아 솥뚜껑 위에다 말린 옷을 입힌 새어머니의 영향 때문이었다.

한국 1호 남성 디자이너, 역사를 만들다
디자인 자체가 사치였던 1961년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명동에 있던 국제복장학원1기생으로 입학했다. 당시에는 대학에 의상학과가 거의 없던 시절이었을 뿐 아니라 국제복장학원 출신 디자이너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없었다. 그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선택했다. 현재 왕성히 활동하며 한국 패션계를 선도하는 수많은 남성 패션디자이너들의 시작이자 꼭짓점이고 금남의 분야였던 패션계에 새로운 지평을 연 인물이 바로 앙드레김이다.
이후 그는 1962년 서울 소공동 조선호텔 앞의 ‘GQ 테일러’라는 양복점 한 켠을 빌려 ‘살롱 앙드레’라는 의상실을 열었고, 그해 12월 반도호텔에서 첫 복장쇼를 열면서 패션계에 입문했다. 그의 나이 겨우 27살이었다.

그리고 당시 세기의 결혼으로 알려진 신성일과 엄앵란의 결혼식 의상을 만들면서 유명세를 탔다. 엄 씨는 앙드레김과의 첫 인연을 이렇게 설명했다. “앙드레김은 디스플레이부터 달랐다. 쇼윈도에 마네킹 일색이던 시대에 나뭇가지 하나에 옷 한 벌만 멋스럽게 걸어 놓은 사람이다. 지금 생각해도 세련된 모습이다. 단 번에 그의 감각에 매료됐다.”
그의 디자인은 전후 복구와 성장에 매몰된 획일적인 사회 분위기와 눈높이를 멀찌감치 앞서 있었다.

호불호 초월한 자신만의 디자인 세계 구축
그를 향한 시선은 존경과 찬사만이 아니었다. 화려한 스타일과 귀족적인 문양 등을 통해 고유한 패션 세계를 구축했다는 평과 함께 동시대성이 결여됐을 뿐 아니라 미디어를 통해 위상이 과장됐다는 지적이 항상 공존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소재인 앙드레김의 정형화된 패션쇼는 그의 의상과 외모, 말투와 더불어 대중에게 친숙한 이미지 획득에 큰 영향을 미쳤다.
패션모델 사이에서 그의 쇼는 죽음의 무대로 불린다고 한다. 배경 음악이 흐르고 그냥 워킹만 하면 되는 다른 쇼와 달리 연기력이 필요한 모션이 많아서다.

특히 한국의 정서를 몽환적으로 표현한 ‘칠겹옷’은 그의 상징이라고 할 만하다. 한국적 원색의 오간자에 용, 사람, 나비, 잉어, 꽃, 새 등이 아플리케로 수놓인 일곱겹의 옷을 입은 모델이 애절한 우리 음악에 맞춰 하나씩 옷을 벗으며 진행된다. “삼국시대 이후 우리의 궁중복과 화려한 비잔틴 예술의 조화가 모든 작품의 기본 모티브”라고 밝혔던 것처럼 동서양의 조화를 완벽하게 이뤄낸 작품이다. 그는 “서양 고전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우리 어머니와 할머니의 한과 그리움을 담아 냈다”고 그는 말했다.

결혼식 장면으로 고정된 피날레 역시 앙드레김 패션쇼의 백미이다. “앙드레 김 무대에 서야 최고 스타로 인정받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연예인들의 선망의 장면이기도 했다. 그간 김희선, 이영애, 장동건, 최지우, 배용준, 김태희 등이 피날레를 장식했다. 여기에는 한 여인의 남편이 되어 사랑을 나주 못한 그의 아픔이 배어있다. “내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영원한 사랑에 다한 그리움의 표현”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시련도 전화위복 계기 만든 타고난 NQ
1999년 이른바 옷로비 의혹사건 진상조사 청문회에서 앙드레 김은 본명을 밝혔다. 새 봉(鳳), 사내 남(男). 김봉남이었다. 그가 이름을 말하는 순간 방청석에서 폭소가 터졌다. 엄숙히 브라운관을 지켜보던 모든 국민들이 웃었다.

예기치 않게 웃음거리가 된 그는 당시 국제엠네스티에 제소할 생각까지 할 만큼 큰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그 모멸감은 길지 않았다. 국민이 그에게 보낸 웃음은 조소가 아닌 친근함의 표현이었다. 정치 공세로 시작된 청문회에서 그가 보여준 한결같은 언행과 세무조사 과정에서 밝혀진 그의 국산소재 애용과 성실 세금납세 사실은 더 큰 호감으로 작용했다. 어린이들마저 그에게 사인을 요청할 만큼 ‘국민 디자이너’로 거듭난 것이다. 화장품·속옷 분야까지 사업을 확장하며 큰돈도 모았다.
이처럼 그에게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만큼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그는 연예계와 정·재계를 아우르는 화려한 인맥으로도 유명했다.

매일 오전 5시30분에 일어나 신문과 방송의 뉴스를 체크한 뒤 지인들의 근황을 살펴 축하나 위로 전화를 했다. 기자들 사이에서도 전화를 걸어 꼼꼼히 모니터링하기로 유명했다. 주한 외교관들이 부임하면 취임 축하 꽃다발을 보내고, 이임할 때는 작별 파티를 해주고, 패션쇼 무대에 모델로도 등장시켜 친한파로 만들었다. 의상실을 찾은 이들에겐 가족 안부를 세심히 묻고, 주변 사람들을 소개하거나 연결해주는 일도 빼놓지 않았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언제나 깍듯이 존대했다.

대중 사로잡은 ‘앙드레김’은 최고의 브랜드
디자이너 앙드레김에 대한 호감과 인정은 곧 앙드레김 브랜드의 가치상승을 의미했다.
2002년부터 앙드레김의 브랜드를 입은 화장품·보석·속옷·아동복·골프복·에어컨·신용카드 등이 줄지어 출시되었다. 삼성물산은 앙드레김 아파트를, 삼성전자는 앙드레김 가전을, 국민카드는 앙드레김 카드, 한국도자기는 앙드레김 식기를 선보였다. 그야말로 ‘대세’였고 ‘흥행 보증수표’였다.

그는 국제적인 공적을 치하하는 많은 상도 받았다.
1982년 그는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문화공로훈장을 받았으며, 1997년 한국 대통령 문화 예술 훈장을 받은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가 되었다.
1999년 샌프란시스코시 정부는 ‘앙드레김의 날’을 두 번이나 선포했고, 프랑스 정부로부터 2000년 ‘예술문학 훈장’을, 2008년 ‘보관문화 훈장’을 각각 수훈했다.

이밖에 1981년 미스유니버시티 수석 디자이너, 1988년 88서울올림픽 한국 대표선수 유니폼 디자인, 2003년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임명됐으며, 2007년 한국언론인협회 주최 ‘자랑스러운 한국인 대상’을 수상했다. 2008년에는 문화 훈장을 수훈했다.
2010년 타계 후 정부에서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며 한국 패션 발전에 이바지한 고인의 공로를 치하했다.

거장(巨匠)의 죽음, 그리고 남겨진 숙제
2005년 그는 대장암 진단을 받고 수술과 담석 치료를 받았다. 이후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왕성한 디자이너 활동을 진행했다. 병들고 노회한 디자이너라고는 믿기지 않는 에너지를 뽐내던 그였다. 하지만 2010년 7월 대장암과 폐렴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했고 한 달 뒤 증세가 악화돼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그는 생전 “나보다 한 살 많은 아르마니도 아직까지 후계자 없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며 후계 디자이너 선정문제를 차일피일 미뤄왔다.

피붙이 하나 남기지 않은 ‘가브리엘 샤넬’과 50대 초반 나이에 권총 피살로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지아니 베르사체’ 역시 사후 후계자가 없었다. 하지만 샤넬의 지주 ‘칼 라거펠트’와 베르사체의 동생인 ‘도나텔라’가 빈자리를 매운 두 브랜드는 시대를 넘어 브랜드 영속성을 이어가고 있다.
대한민국 전 분야를 통틀어서도 이름만으로 브랜드 가치를 갖는 개인은 많지 않다. 그의 철학과 추구한 이상을 전승해 앙드레김을 한국의 대표 브랜드로 키우는 일은 이제 우리 모두의 숙제로 남았다.

원유진 기자 ssakssaky@itn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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