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토& 멘티
-전 패션협회 회장 공석붕-

우선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

2003년에 선출했던 월드 디자이너는 오늘 파리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

1996년 미국의 패션과 유럽의 패션이 각기 개성 있는 분위기로 갈라지면서 당시 한국 패션협회는 21세기에 대비한 두 가지 방향으로 앞날을 계획하고 틀을 잡아 나갔다.

그 첫째가 세계적인 한국 디자이너를 육성하기 위한 소위 ‘월드 디자이너 육성사업’이었고 둘째가 유럽도 미주도 아닌 아시아의 독특한 패션의 창작을 위한 아시아 패션 연합회를 설립해 세계 패션의 제3의 경지를 구축해 보자는 프로젝트였다. 이 두 가지 사업은 예정대로 진행이 되었지만, 아시아 패션 연합회 이야기는 다음 적당한 기회로 마루고 오늘은 월드 디자이너 이야기만 할까 한다.

이 프로젝트를 위하여 당시의 상공부와 서울 시청을 상대로 교섭을 시작했다. 교섭의 내용이란 다름 아닌 세계적인 한국인 디자이너를 육성하자는 것. 이제까지 찔끔찔끔 몇 백만 원씩 단편적으로 지원하던 것을 대담하게 3인을 한 팀으로, 일인당 2억원 정도를 지속적으로 최소 2년씩 지원하며 연속 사업으로 한 10년간 30억을 들여 다섯 팀을 지원하다 보면 군계일학이라고 그 중에 한 사람의 세계적인 디자이너만 탄생해도 본전은 빼는 것이란 이론으로 시작했던 것이다.

당시 크리스찬 디올이 그 브랜드 사용료만으로도 연간 수입이 5억달러란 이야기에 비유하면 10년 동안에 30억 원 투입이란 타당한 그림으로 보았다. 그래서 시작 되었던 사업이었고 이 사업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한 운영위원회가 구성되고 첫해에 응모한 디자이너 52명의 심사에 들어갔다. 일차 심사에서 10명을 추려내고 2차 심사에서 마지막 3인이 선발했다. 물론 심사는 엄격하였고 투명했다.

그런데 당시의 쟁쟁하다던 많은 디자이너가 지원하고 보니 낙천된 사람의 실망도란 이해할 수도 있다. “왜 내가 안 되고 저 사람이 뽑혔나”하는 자기 나름의 판단인데 여기에 얼토당토않게 이 심사에 부정이 개입해 돈이 오간 흔적이 있다는 근거 없는 투서가 두 사람에 의하여 청와대에 전달되다 보니까 앞뒤 조사도 해보지 않은 관계당국자들은 요사이 말로 내 개인재산을 뒤지는 사찰을 시작했다.

더욱 경망스러웠던 것은 몇 년에 걸쳐 검토되고 시행에 들어갔던 이 사업을 이런 투서 한 두 장에 제대로 된 조사도 없이 “왜 이렇게 시끄럽게 하느냐”란 욕설(?)과 함께 프로젝트 자체를 취소해버린 철없는 조치였다. 분하고 통탄스러운 배신감에 13년간 봉사하던 패션협회장 자리를 걷어 찼지만, 지금 생각해도 아깝기 짝이 없던 사업이다. 2004년의 일이었다.

그나마 첫 사업으로 발표한 세 사람에게는 2년간 지원이 계속됐고, 그 세 사람 중 하나였던 문영희 씨가 패션의 중심지인 파리에서 자리를 잡는 계기가 되었다.

세계 패션의 흐름을 주도하는 파리 컬렉션은 모든 디자이너가 꿈꾸는 최고의 무대다. 여기에 우리 디자이너 문영희의 이름이 벌써 9년째 오르고 있으며 파리의 패션 기자들은 그녀를 극찬하고 있다. 가령 ‘마담 피가로’라는 잡지의 패션 담당기자인 엘리사베스 빠예 여사는 “문영희의 의상에 대한 바탕은 한국의 정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고 파리 프레타 포르테 홍보담당CEO인 미쉘 몽타뉴 여사는 “문영희는 파리지앵과 한국문화 사이를 번갈아 가며 보여주는 것 같다”라고 극찬했다.

문영희 씨는 프랑스 의상 협회 정식 회원이 됐으며, 디디에 그랑박 회장은 “그녀가 파리에 온 최초의 디자이너중의 한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 많은 애착을 갖는다”고 말했다.

파리의 유명한 뮤지컬 ‘아담과 이브’의 의상 디렉터인 크리스천 자깽은 수시로 문영희 디자이너의 의상을 그녀의 뮤지컬 무대에 등장시킨다고 했다.

문영희란 디자이너는 파리를 선택했고 파리는 문영희 를 선택했다. 문영희 패션의 주된 주제는 자연미와 한국 패션의 창조적 현대화다. 그녀의 패션에는 화장기가 없고 지극히 동양적인 그녀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 파리의 패션계에선 그녀의 패션 스타일을 한복과 같은 동양적인 선에서 자연스러우면서도 독창적인 디자인을 이끌어낸 옷이라고 평가한다.

소장할 가치가 있고 실용적으로 입고 즐길 수 있으며 느낌이 살아있는 옷, 그것이 문영희 옷에 대한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평이다. 파리의 패션지 ‘마리 끌레르’나 ‘보그’에서 그녀의 작품 활동의 기사를 보는 것은 빈번하며 ‘마담 휘가로’나 ‘엘르’의 표지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귀한 존재다.

극단적인 말을 좋아하는 사람은 한국인의 파리 진출엔 한계가 있다고 자포자기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러한 관념을 깨뜨린 사람이 디자이너 문영희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달릴 수 있는 마라톤의 한계는 2시간 20분이라고 단정하고 그런 조건으로 몇 10년을 끌어오더니 이 기록이 한번 깨어지니 2시간 10분대도 깨어졌다. 100m의 인간의 한계는 10초라고 단정하여 버렸던 기록도 한번 깨어지고 나니 계속 깨어지는 것이 기록이라면 한국 디자이너 문영희가 파리에서 깨뜨린 기록도 이제부터 계속 깨져 나갈 것이라고 볼 때 철 없는 사람들의 투서 한 장, 그 투서가 시끄럽다고 프로젝트 자체를 망가뜨려버린 당국자의 좁은 식견이 아니었더라면 LPGA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우리 젊은 소녀들의 골프 실적만큼 파리의 패션도 지금쯤은 우리 한국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마당이 되었을 터인데 철없는 당국자의 단견으로 희망의 새싹이 잘려진 현실이 아깝기 그지없다.

파리에 부임하는 대사나 무역관계자들이 문화관계 인사를 만나면 “한국인 디자이너 문영희 를 아느냐”는 질문이 먼저 나온다니까 민간 외교 성과만으로도 대단한 업적을 쌓은 문영희 씨다. 그녀는 이미 2008년에는 ‘L’Ordre National Du Merit’라는 프랑스 국가 훈장을 받음으로써 그녀의 실력을 인정받았다. 단 기간 내에 디자이너 문영희 씨가 이룩한 대단한 업적이다.

대사가 가질 수 있는 문화관계 장관과의 대담시간은 길어야 10분이라지만 디자이너 문영희 씨는 제한된 시간이 없다는 이야기다.

그녀의 성공 스토리는 지난 3월 17일 KBS의 ‘글로벌 성공시대’란 타이틀로 60분간 소개되었던 ‘한국인 디자이너 문영희’란 내용만으로도 그녀의 성공담은 충분히 입증되었고 앞으로도 더 많은 우리 디자이너가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주마가편이다. 시스템의 재 구축이 새삼 아쉬워지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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