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김, 그의 인생 키워드 여섯 장면

본지는 900호를 맞아 준비한 특집의 주제로 주저없이 ‘앙드레김’을 꼽았다. 평소 본지에 보내 준 그의 애정과 관심은 차치하더라도 한국의 디자이너 중 이름 자체로 브랜드 가치를 갖고 시대정신을 담아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여섯 가지 장면을 통해 인생의 궤적을 되짚어 보고, 현재 앙드레김 디자인 아뜰리에를 운영하고 있는 아들 김중도 씨를 통해 브랜드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들어 봤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토요일이 되면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게 된다.
“디자이너 앙드레김입니다. 신문 잘 봤습니다.” 생전 한 번도 거른 적 없는 안부전화가 걸려 올 것 같아서다.
많은 패션인들이 그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을 함께 나눴으면 하는 바람이다.
<편집자 주>


앙드레 김, 그의 인생 키워드 여섯 장면

#1 사랑하는 어머니, 하지만 사회적 편견은 평생 트라우마로…
앙드레 김은 세 살 때부터 계모의 슬하에서 자랐다. 그 자신도 계모를 친어머니처럼 따랐고 계모도 그를 친아들처럼 아껴주었지만 과거 계모와 슬하 자녀에 대한 정형화된 편견은 그를 괴롭혔다.

젊은 시절, 영화감독의 권유로 ‘비오는 날의 오후 3시’라는 영화에 배우로 출연할 정도로 준수한 모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앙드레 김이 심한 외모 콤플렉스를 갖게 된 이유를 친어머니와 함께 살지 않는 것에 대한 사회적 열등감의 전이로 해석하는 심리학자도 있었다. 자신을 극진히 사랑하고 보살핀 새어머니를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앙드레 김이 백여 벌의 흰색 옷을 소유하는 등 온통 흰색에 집착하는 것도 새어머니의 영향 때문이다. 매일 아침마다 그에게 양잿물에 새하얗게 빨아 솥뚜껑 위에다 말린 옷을 입혀 보냈다. 앙드레 김이 소독제를 탄 물에 새하얗게 빤 흰색 면직물 옷을 평생토록 입을 정도로 집착했던 이유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25세에 어머니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을 때 1년 동안 밤마다 베개가 온통 젖을 정도로 울었다. 아마 평생에 걸쳐 울 것을 그때 전부 쏟아버려 이제는 눈물이 메마른 것 같다."

#2 오드리 헵번, 미운 오리 새끼 백조로 만들다
‘퍼니 페이스(Funny Face)’라는 영화는 외톨이였던 그의 운명을 180도 돌려 놓았다. 영화 속 주연배우인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이 패션모델이 되어 지방시(Hubert de Givenchy) 의상을 입고 파리의 명소를 다니며 사진을 찍는 환상적인 장면이었다.
2002년 펴낸 회고록 ‘마이 판타지’에서 그는 디자이너가 된 계기를 “퍼니 페이스에서 지방시의 의상을 본 것”이라고 회고했다.

옷은 물리적으로 인간의 체온을 높이고 보호해 주기도 하지만 심리적인 추위, 즉 고독감을 경험한 사람에게 심리적인 온기를 선사해 주기도 한다. 그는 영화 속 오드리 헵번의 모습에 자신을 투사했는지 모른다. 사회 속 미운 오리 새끼 같았던 자신도 패션 디자인 활동을 통해 백조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3 경직된 시대 속 용감한 도전, 한국 최초 남성 디자이너
디자인 자체가 사치였던 1961년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명동에 있던 국제복장학원에 들어갔다. 당시에는 대학에 의상학과가 거의 없던 시절이었을 뿐 아니라 국제복장학원 출신 디자이너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없었다. 그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선택했다. 현재 왕성히 활동하며 한국 패션계를 선도하는 수많은 남성 패션디자이너들의 시작이자 꼭짓점이고 금남의 분야였던 패션계에 새로운 지평을 연 인물이 바로 앙드레 김이다.
이후 그는 1962년 서울 반도호텔에서 첫 복장쇼를 열면서 패션계에 입문했고 서울 명동에 '앙드레 김'이란 간판을 단 의상실을 열면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그리고 당시 세기의 결혼으로 알려진 신성일과 엄앵란의 결혼식 의상을 만들면서 유명세를 탔다. 엄 씨는 앙드레 김과의 첫 인연을 이렇게 설명했다. “앙드레 김은 디스플레이부터 달랐다. 쇼윈도에 마네킹 일색이던 시대에 나뭇가지 하나에 옷 한 벌만 멋스럽게 걸어 놓은 사람이다. 지금 생각해도 세련된 모습이다. 단 번에 그의 감각에 매료됐다.”

#4 한국 정통미 담은 몽환적 패션쇼, 세계를 품다
그를 향한 시선은 존경과 찬사만이 아니었다. 화려한 색감, 고유의 문양 등을 통해 고유한 패션 세계를 구축했다는 평과 함께 동시대성이 결여됐을 뿐 아니라 미디어를 통해 위상이 과장됐다는 지적이 항상 공존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소재인 앙드레 김의 정형화된 패션쇼는 그의 의상과 외모, 말투와 더불어 대중에게 친숙한 이미지 획득에 큰 영향을 미쳤다.
패션 모델 사이에서 그의 쇼는 죽음의 무대로 불린다고 한다. 배경 음악이 흐르고 그냥 워킹만 하면 되는 다른 쇼와 달리 연기력이 필요한 모션이 많아서다.

특히 한국의 정서를 몽환적으로 표현한 ‘칠겹옷’은 그의 상징이라고 할 만하다. 한국적 원색의 오간자에 용, 사람, 나비, 잉어, 꽃, 새 등이 아플리케로 수놓인 일곱겹의 옷을 입은 모델이 애절한 우리 음악에 맞춰 하나씩 옷을 벗으며 진행된다. “삼국시대 이후 우리의 궁중복과 화려한 비잔틴 예술의 조화가 모든 작품의 기본 모티브”라고 밝혔던 것처럼 동서양의 조화를 완벽하게 이뤄낸 작품이다. 그는 "서양 고전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우리 어머니와 할머니의 한과 그리움을 담아 냈다”고 그는 말했다.

결혼식 장면으로 고정된 피날레 역시 앙드레 김 패션쇼의 상징이다. ‘앙드레 김 무대에 서야 최고 스타로 인정받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연예인들의 선망의 장면이기도 했다. 그간 김희선, 이영애, 장동건, 최지우, 배용준, 김태희 등이 피날레를 장식했다. 여기에는 한 여인의 남편이 되어 사랑을 나주 못한 그의 아픔이 배어있다. “내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영원한 사랑에 다한 그리움의 표현”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5 NQ(인간관계지수)의 달인, 민간외교사절 마다않는 마당발
1999년 이른바 옷로비 의혹사건 진상조사 청문회에서 앙드레 김은 본명을 밝혔다. 새 봉(鳳), 사내 남(男). 김봉남이었다. 그가 이름을 말하는 순간 방청석에서 폭소가 터졌다. 엄숙히 브라운관을 지켜보던 모든 국민들이 웃었다.

예기치 않게 웃음거리가 된 그는 당시 국제엠네스티에 제소할 생각까지 할 만큼 큰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그 모멸감은 길지 않았다. 국민이 그에게 보낸 웃음은 조소가 아닌 친근함의 표현이었다. 야당의 정치 공세로 시작된 청문회에서 그가 보여준 한결같은 언행과 세무조사 과정에서 밝혀진 그의 국산소재 애용과 성실 세금납세 사실은 더 큰 호감으로 작용했다. 어린이들마저 그에게 사인을 요청할 만큼 ‘국민 디자이너’로 거듭난 것이다. 화장품·속옷 분야까지 사업을 확장하며 큰돈도 모았다.
이처럼 그에게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만큼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그는 연예계와 정·재계를 아우르는 화려한 인맥으로도 유명했다.

매일 오전 5시30분에 일어나 신문과 방송의 뉴스를 체크한 뒤 지인들의 근황을 살펴 축하나 위로 전화를 했다. 기자들 사이에서도 전화를 걸어 꼼꼼히 모니터링하기로 유명했다. 주한 외교관들이 부임하면 취임 축하 꽃다발을 보내고, 이임할 때는 작별 파티를 해주고, 패션쇼 무대에 모델로도 등장시켜 친한파로 만들었다. 의상실을 찾은 이들에겐 가족 안부를 세심히 묻고, 주변 사람들을 소개하거나 연결해주는 일도 빼놓지 않았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언제나 깍듯이 존대했다.

#6 거장(巨匠)의 죽음, 그리고 남겨진 숙제
2005년 그는 대장암 진단을 받고 수술과 담석 치료를 받았다. 이후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왕성한 디자이너 활동을 진행했다. 병들고 노회한 디자이너라고는 믿기지 않는 에너지를 뽐내던 그였다. 하지만 2010년 7월 대장암과 폐렴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했고 한 달 뒤 증세가 악화돼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그는 생전 “나보다 한 살 많은 아르마니도 아직까지 후계자 없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며 후계 디자이너 선정문제를 차일피일 미뤄왔다.

피붙이 하나 남기지 않은 프랑스 유명 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과 50대 초반 나이에 권총 피살로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잔니 베르사체’ 역시 사후 후계자가 없었다.
하지만 샤넬의 지주 ‘카를 라거펠트’와 베르사체의 동생인 ‘도나텔라’가 빈자리를 매운 두 브랜드는 시대를 넘어 브랜드 영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앙드레 김은 ‘걸어 다니는 패션기업’이다. 생활 산업 전반에 걸친 브랜드의 연간 매출은 모두 합치면 약 1000억원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물질적인 제품에 디자이너의 예술적 숨결과 영혼을 불어넣는 협업(collaboration)이 트렌드로 부상한 요즘, 기대만큼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역량과 디자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국내 디자이너는 앙드레김 외에는 아직 마땅히 내세울 이가 없다. 국내 전 분야를 통틀어서도 이름만으로 브랜드 가치를 갖는 개인은 많지 않다.
그의 철학과 추구한 이상를 전승해 앙드레김을 한국의 대표 브랜드로 키우는 일은 이제 우리 모두의 숙제로 남았다.

원유진 기자 ssakssaky@itn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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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김, 그는 누구인가
앙드레 김씨는 1935년 경기 고양군 신도면 구파발리(지금의 서울 은평구)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고교를 졸업한 뒤, 61년 고 최경자씨가 서울 명동에 설립한 국제복장학원의 1기생으로 디자이너 수업을 받았다. 이듬해인 62년 서울 소공동에 ‘살롱 앙드레’(앙드레 김 의상실)를 열고 한국 최초의 남성 패션 디자이너가 됐으며, 개성 있는 디자인이 인정을 받아 66년 프랑스 파리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패션쇼를 열었다.

그는 1960년대에 영화배우 엄앵란씨 등의 옷을 만들며 유명세를 탔고, 80년 미스유니버스 대회의 주 디자이너로 뽑혔다. 88년 서울올림픽에서는 대한민국 대표팀의 선수복을 디자인하는 등 패션 디자이너로서 40여년 동안 ‘독보적인’ 지위를 누렸다. 그의 패션쇼는 당대 최고의 연예인들이 등장했고 팝스타인 고 마이클 잭슨과 배우 나스타샤 킨스키, 브룩 실즈 등 해외 스타들도 그가 디자인한 옷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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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말말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 - 앙드레 김 선생님은 옷에 관심이 없는 이들에게도 패션이 무엇인지 보여줬고, 그로 인해 꿈을 꿀 수 있도록 했던 패션 디자이너이다.
소설가 박완서 - 유니세프를 위해 정말 헌신적으로 일하신 분이다. 패션은 물론 봉사로도 존경을 깊이 존경했다.
마이클 잭슨 - 돈은 원하는 대로 줄 테니 미국으로 와서 나의 전속 디자이너가 되어달라.
서울대 교수 김민자 (의류학과) - 앙드레 김은 이 시대 문화 정체성의 생성자이며 패션은 그 하나의 매개체다.
패션 디자이너 최범석 - 디자이너로서 평가하기보다는 아티스트로 평가하는 게 맞는 것 같다. 그가 하는 건 예술이다.
본지 발행인 조영일 - 그가 떠난 빈자리를 쉽게 메우기 어려운 상황이다. 한 세기에 한명 나올까 말까하는 거장 앙드레김의 위대한 족적과 명성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가 관건이다.
배우 김희선 - 무대에서 넘어졌을 때 선생님께서 부축해주셨다. 백마 탄 왕자가 구하러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배우 송승헌 - 신인으로서 조금 얼굴을 알리기 시작할 때인데 방송국으로 전화가 왔다. 톱스타만 하는 쇼에 내 가능성만 보고 기회를 주셨다.
배우 원빈 - 내 꿈을 이루는데 많은 것을 얻었다. 선생님은 나에게 은인 같은 분이다.
배우 장동건- 앙드레김 선생님의 옷을 입고 외국에 나갔을 때 동양의 왕족이냐고 질문 받은 적이 있다. 그래서 해외에 나갈 때 한 벌씩 챙겨 가면 득을 볼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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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김의 YES or NO

YES
앙드레김은 30벌에 이르는 똑같은 디자인의 흰색 의상만을 고집했다. 흰색은 ‘순수’와 ‘영원’과 ‘화려함’이라는 자신의 예술세계를 상징화한 색깔이기 때문이다. 디자인 뿐 아니라 흰색 에쿠스 승용차, 흰색 말티즈 강아지까지 생활 전반을 물들였다. 서울대병원에서 대장암 수술을 마친 앙드레김은 환자복 대신에 자신이 디자인한 ‘흰 옷’을 입었다. 또 입원할 때마다 직접 디자인한 흰색의 이불도 가져와 덮었다.

그는 또 ‘미디어 광’이었다. 집에 TV 5대를 두고 여러 채널을 동시에 섭렵했고, 매일 오전 5시 반에 일어나 일간지, 경제지, 영자지, 스포츠지 등 총 17개의 신문을 꼼꼼히 읽었다. 그는 스스로 ‘패션을 통해 한국의 미를 세계에 알려야 할 사명이 있다’고 생각했다. 주한 외교사절단과 그 부인들을 자신의 패션쇼 무대에 모델로 세우거나 국산 옷감만을 고집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자신의 패션쇼 피날레로 반드시 결혼식 장면을 연출했다. 남녀가 결혼을 해 가정을 이루는 것을 인간의 가장 성스럽고 아름다운 순간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어린 아이들을 끔찍이도 사랑했다. 47세이던 1982년에 당시 생후 18개월 된 아들 중도 씨를 입양해 큰 사랑을 쏟았다.

NO
스캔들에 얽히거나 평소 노출이 심한 연예인들은 아무리 인지도가 높아도 자신의 무대에 섭외하지 않았다. 그는 가부장적인 인물로 비춰질 만큼 예의와 도덕적인 문제에서만큼은 타협하지 않았다.
해외로 초청받을 경우 그는 자신이 머무르는 호텔 방의 미니바를 일절 사용하지 않기로도 유명했다. “초청자 부담이라고 해서 미니바를 제멋대로 사용하는 것은 나 개인의 인격 문제인 동시에 한국인의 자존심을 해치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생전 설명이었다.
남 앞에서 노래를 하지도 않았고 술과 담배도 하지 않았다. 포커나 고스톱같은 국민놀이라고 불리는 간단한 도박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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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김, 그의 인생 키워드 여섯 장면

#1 사랑하는 어머니, 하지만 사회적 편견은 평생 트라우마로…
앙드레 김은 세 살 때부터 계모의 슬하에서 자랐다. 그 자신도 계모를 친어머니처럼 따랐고 계모도 그를 친아들처럼 아껴주었지만 과거 계모와 슬하 자녀에 대한 정형화된 편견은 그를 괴롭혔다.

젊은 시절, 영화감독의 권유로 ‘비오는 날의 오후 3시’라는 영화에 배우로 출연할 정도로 준수한 모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앙드레 김이 심한 외모 콤플렉스를 갖게 된 이유를 친어머니와 함께 살지 않는 것에 대한 사회적 열등감의 전이로 해석하는 심리학자도 있었다. 자신을 극진히 사랑하고 보살핀 새어머니를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앙드레 김이 백여 벌의 흰색 옷을 소유하는 등 온통 흰색에 집착하는 것도 새어머니의 영향 때문이다. 매일 아침마다 그에게 양잿물에 새하얗게 빨아 솥뚜껑 위에다 말린 옷을 입혀 보냈다. 앙드레 김이 흰색 면직물 옷을 평생토록 입을 정도로 집착했던 이유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25세에 어머니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을 때 1년 동안 밤마다 베개가 온통 젖을 정도로 울었다. 아마 평생에 걸쳐 울 것을 그때 전부 쏟아버려 이제는 눈물이 메마른 것 같다."

#2 오드리 헵번, 미운 오리 새끼 백조로 만들다
‘퍼니 페이스(Funny Face)’라는 영화는 외톨이였던 그의 운명을 180도 돌려 놓았다. 영화 속 주연배우인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이 패션모델이 되어 지방시(Hubert de Givenchy) 의상을 입고 파리의 명소를 다니며 사진을 찍는 환상적인 장면이었다.
2002년 펴낸 회고록 ‘마이 판타지’에서 그는 디자이너가 된 계기를 “퍼니 페이스에서 지방시의 의상을 본 것”이라고 회고했다.

옷은 물리적으로 인간의 체온을 높이고 보호해 주기도 하지만 심리적인 추위, 즉 고독감을 경험한 사람에게 심리적인 온기를 선사해 주기도 한다. 그는 영화 속 오드리 헵번의 모습에 자신을 투사했는지 모른다. 사회 속 미운 오리 새끼 같았던 자신도 패션 디자인 활동을 통해 백조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3 경직된 시대 속 용감한 도전, 한국 최초 남성 디자이너
디자인 자체가 사치였던 1961년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명동에 있던 국제복장학원에 들어갔다. 당시에는 대학에 의상학과가 거의 없던 시절이었을 뿐 아니라 국제복장학원 출신 디자이너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없었다. 그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선택했다. 현재 왕성히 활동하며 한국 패션계를 선도하는 수많은 남성 패션디자이너들의 시작이자 꼭짓점이고 금남의 분야였던 패션계에 새로운 지평을 연 인물이 바로 앙드레 김이다.
이후 그는 1962년 서울 반도호텔에서 첫 복장쇼를 열면서 패션계에 입문했고 서울 명동에 '앙드레 김'이란 간판을 단 의상실을 열면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그리고 당시 세기의 결혼으로 알려진 신성일과 엄앵란의 결혼식 의상을 만들면서 유명세를 탔다. 엄 씨는 앙드레 김과의 첫 인연을 이렇게 설명했다. “앙드레 김은 디스플레이부터 달랐다. 쇼윈도에 마네킹 일색이던 시대에 나뭇가지 하나에 옷 한 벌만 멋스럽게 걸어 놓은 사람이다. 지금 생각해도 세련된 모습이다. 단 번에 그의 감각에 매료됐다.”

#4 한국 정통미 담은 몽환적 패션쇼, 세계를 품다
패션 모델 사이에서 그의 쇼는 죽음의 무대로 불린다고 한다. 배경 음악이 흐르고 그냥 워킹만 하면 되는 다른 쇼와 달리 연기력이 필요한 모션이 많아서다.

특히 한국의 정서를 몽환적으로 표현한 ‘칠겹옷’은 그의 상징이라고 할 만하다. 한국적 원색의 오간자에 용, 사람, 나비, 잉어, 꽃, 새 등이 아플리케로 수놓인 일곱겹의 옷을 입은 모델이 애절한 우리 음악에 맞춰 하나씩 옷을 벗으며 진행된다. “삼국시대 이후 우리의 궁중복과 화려한 비잔틴 예술의 조화가 모든 작품의 기본 모티브”라고 밝혔던 것처럼 동서양의 조화를 완벽하게 이뤄낸 작품이다. 그는 "서양 고전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우리 어머니와 할머니의 한과 그리움을 담아 냈다”고 그는 말했다.

결혼식 장면으로 고정된 피날레 역시 앙드레 김 패션쇼의 상징이다. ‘앙드레 김 무대에 서야 최고 스타로 인정받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연예인들의 선망의 장면이기도 했다. 그간 김희선, 이영애, 장동건, 최지우, 배용준, 김태희 등이 피날레를 장식했다. 여기에는 한 여인의 남편이 되어 사랑을 나주 못한 그의 아픔이 배어있다. “내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영원한 사랑에 다한 그리움의 표현”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5 NQ(인간관계지수)의 달인, 민간외교사절 마다않는 마당발
1999년 이른바 옷로비 의혹사건 진상조사 청문회에서 앙드레 김은 본명을 밝혔다. 그가 이름을 말하는 순간 엄숙히 브라운관을 지켜보던 모든 국민들이 웃었다.

예기치 않게 웃음거리가 된 그는 당시 국제엠네스티에 제소할 생각까지 할 만큼 큰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그 모멸감은 길지 않았다. 국민이 그에게 보낸 웃음은 조소가 아닌 친근함의 표현이었다. 청문회에서 그가 보여준 한결같은 언행과 세무조사 과정에서 밝혀진 그의 국산소재 애용과 성실 세금납세 사실은 더 큰 호감으로 작용했다.
이처럼 그에게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만큼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그는 연예계와 정·재계를 아우르는 화려한 인맥으로도 유명했다.

매일 오전 5시30분에 일어나 신문과 방송을 체크한 뒤 지인들의 근황을 살펴 축하나 위로 전화를 했다. 기자들 사이에서도 전화를 걸어 꼼꼼히 모니터링하기로 유명했다. 주한 외교관들이 부임하면 취임 축하 꽃다발을 보내고, 이임할 때는 작별 파티를 해주고, 패션쇼 무대에 모델로도 등장시켜 친한파로 만들었다. 의상실을 찾은 이들에겐 가족 안부를 세심히 묻고, 주변 사람들을 소개하거나 연결해주는 일도 빼놓지 않았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언제나 깍듯이 존대했다.

#6 거장(巨匠)의 죽음, 그리고 남겨진 숙제
2005년 그는 대장암 진단을 받고 수술과 담석 치료를 받았다. 이후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왕성한 디자이너 활동을 진행했다. 병들고 노회한 디자이너라고는 믿기지 않는 에너지를 뽐내던 그였다. 하지만 2010년 7월 대장암과 폐렴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했고 한 달 뒤 증세가 악화돼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그는 생전 “나보다 한 살 많은 아르마니도 아직까지 후계자 없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며 후계 디자이너 선정문제를 차일피일 미뤄왔다.

앙드레 김은 ‘걸어 다니는 패션기업’이다. 생활 산업 전반에 걸친 브랜드의 가치는 약 1000억원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물질적인 제품에 디자이너의 예술적 숨결과 영혼을 불어넣는 협업(collaboration)이 트렌드로 부상한 요즘, 기대만큼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역량과 디자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국내 디자이너는 앙드레김 외에는 아직 마땅히 내세울 이가 없다. 국내 전 분야를 통틀어서도 이름만으로 브랜드 가치를 갖는 개인은 많지 않다.
그의 철학과 추구한 이상을 전승해 앙드레김을 한국의 대표 브랜드로 키우는 일은 이제 우리 모두의 숙제로 남았다.

원유진 기자 ssakssaky@itn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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