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1년 가난한 독일계 이민 아이작·싱거가 뉴욕에 미싱(재봉틀)회사를 설립했다. '월부 판매'. '하청재도' 등 새로운 판매시스템을 선보이면서 설립 10년만에 세계제일의 미싱회사가 된 싱거.1870년대부터는 해외투자에도 눈을 돌려 영국, 유럽대륙, 帝政러시아 등에 닥치는 대로 대형공장을 건설, 20세기 초에는 세계시장을 제패했다.그러나 러사아 혁명에 의한 자산몰수, 세계공황, 제2차 세계대전 등으로 이어진 파란으로 싱거의 세력이 급격히 쇠퇴한다. 1950년대 후반에는 일본제 미싱의 세계시장 진출로 더욱 타격을 받은 싱거가 대세만회작전을 벌인 것은 1958년 새사장으로 43세의 도널드 커처를 영입한 뒤 부터였다.경영의 합리화, 신형기종의 개발 등에 주력한 결과 59년부터 30% 정도로 하락한 미국시장에서의 쉐어가 50%로 회복했다.한편 유럽을 비롯 중남미, 중동, 아프리카, 아시아 등지로 사업을 확대한데 이어 사업다각화에도 착수한다. 미싱이라는 상품의 한계를 예상, 싱거라는 브랜드와 판로를 활용하기위해 청소기, 세탁기, 냉장고 등 가전제품을 필두로 음향기기, 사무기기, 통신기기, 항공우주분야 그리고 주택, 통신판매까지 그야말로 문어발식 확장을 거듭했다. 따라서 60년대까지는 승승장구, 매상 3배, 이익도 2배로 불어나는 등 순조로운 듯 했으나 70년대로 접어들면서 싱거의 다각화전략이 심각한 위기에 빠진다. 74년의 매상이 26억달러로 전년실적을 약간 웃돌았으나 수익은 크게 떨어진 1천만달러의 적자를 기록한 것이다. 75년의 실적은 더욱 악화된 4억5천만달러라는 손실을 계상, 주가도 73년 당시 1주당 70달러에서 10달러대로 급락했다. 이같은 싱거의 경영악화 원인은 석유위기라는 엄청난 불황에 사무기기분야에서의 뼈아픈 실패가 특히 크게 작용했다. 다각화라는 전략을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비채산부문까지 떠안아 사무기기부문은 10년간 계속적자, 항공우주부문과 주택부문도 붐이 사라지고 불황에 밀려 밑빠진 독이 돼버린 것이다.75년 한때 구세주였던 커처 사장이 물러나고 사장겸 회장으로 조셉·필레빈이 취임하면서 사무기기부문을 비롯 통신기기, 가전, 통신판매부문 등을 매각했으나 75년말 결산에서는 4억5천만달러의 결손이었다.이후 3년간 2만2천명의 종업원과 상당수의 간부를 해직시키는 등 대규모 재건작업을 추진, 다소 회복되는 듯 했으나 86년엔 본업인 미싱부문에서도 철퇴하기에 이른다. 그후 싱거는 M&A 바람에 휘말리기 시작, 90년대에 캐나다국적 중국인회사에 매수 당하고 그 명칭도 미국회사 연감에서 사라져 버렸다.은행원이었던 조지·이스트맨이 사진건판(寫眞乾板)을 발명하면서 1880년에 설립한 코닥. 그후 거의 1세기간을 코닥은 사진, 영화필름의 대명사로 이른바 왕자의 위치를 지켜왔다.그러나 창립 1백주년을 맞은 1980년대로 들어서면서 그 명성이 갑자기 흔들리면서 고난이 엄습한다. 라이벌 기업과의 힘겨운 경쟁, TV, VTR, 복사기 등의 등장으로 70년대부터 흔들려온 코닥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인스턴트·카메라와 복사기 시장에 진출한다.1977년 새 사장으로 취임한 52세의 콜비·챈들러는 "적극적 사업확대전략"을 전개한다. 기업매수에 의한 신규분야 진출, 타사제품에 코닥상표를 붙여 판매하는 'OEM 商法' 등을 도입했다. 챈들러 사장은 80년대까지 異業種 기업을 계속 매수, 매상확대와 수익률 증대에 기여했다. 따라서 코닥은 정보시스템, 전자, 화학, 바이오 테크놀러지, 건강, 의료 등 거의 전 산업 분야를 포함하는 콩글로메리트(複合企業)로 변신했다. 그런데 89년부터 코닥의 경영실적이 급격히 악화된다. 그해 이익률이 17%대에서 8%대로 떨어지고 순이익도 14억달러에서 5억달러로 격감, 4·4분기에만 6천만달러의 적자를 기록한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의약품회사 스터링·드러그를 매수하면서 투입한 51억달러의 차입금과 그에따른 금리부담이었고 그동안 매수했던 기업의 상당수가 채산성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다 본업인 사진필름부분에서도 일본의 후지필름, 독일의 아그파, 미국의 3M 등 라이벌 기업들의 저가공세에 밀렸던 것이다. 챈들러회장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전 세계의 종업원 3% 감축, 昇給중지, 설비투자의 대폭감소, 정보 시스템 등 일부업종의 매각을 추진하는 일련의 대책에 착수했다.그러나 코닥은 큰 기대를 걸었던 의약품 분야의 부진, 사진필름분야에서도 계속 쉐어가 줄어드는 등 경영상태가 호전되지 않는 바람에 12년간 성공적으로 회사를 이끌어온 챈들러 회장이 퇴진하기에 이른다.이 무렵이 되어서야 오랫동안 왕자의 자리에 길들여져 온 종업원들도 위기 의식을 갖게 되었으며 후임사장인 케이·휘트모어는 2년 만인 92년에 퇴임하는 수난을 겪는다.그 뒤를 이어 모토롤라사 회장이었던 조지·핏셔(52세)가 취임, 그 동안의 적극적 확대 전략을 전면 수정, 파격적인 '리스트라·減量작전'을 추진하는 한편 새로운 경영목표로 '정보혁명에의 도전'을 내걸고 명문회사 코닥의 재진에 박차를 가했으나 고전은 지금껏 계속되고 있다.코닥의 몰락은 장래성이 없다고 포기했던 35밀리 카메라가 70년대에 세계적 붐을 이루었고 기업매수에 의한 다각화 전략도 뒤늦게 도입하는 등 타이밍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데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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